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밀리에 방문해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이 대(對) 이란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내년 출범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중동 정책 전환에 대비하기 위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23일(현지시간)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우디 정부 당국자 세 명을 인용, 전날 네타냐후 총리가 사우디 홍해 신도시 네옴을 찾아 무함마드 왕세자와 만났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 수장인 요시 코헨 국장도 동행했다. 같은 날 사우디에 머물고 있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동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우디 정부는 “그런 만남은 없었다”고 했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나는 수년간 그런 것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며 만남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최고위급 회동 사실이 알려진 건 처음이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그간 팔레스타인 분쟁을 이유로 이스라엘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2002년 선언한 아랍 평화 구상에 따라 이스라엘이 서안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수립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과 수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8월 아랍에미리트가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과 공식적 외교 관계를 수립한 뒤 바레인과 수단까지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두 지도자는 양국 관계 정상화와 이란 문제를 집중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장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두 가지 메시지를 발신하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우선 ‘공동의 적’ 이란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가 된다. 양국은 이번 만남을 통해 이란이 핵 재무장에 나설 경우 중동 구도를 ‘반(反)이스라엘 동맹’에서 ‘반이란 동맹’으로 재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최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이 2015년 핵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약속한 수준의 12배가 넘는 우라늄을 비축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역내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다.
더 나아가 차기 미 행정부에 보내는 압박 신호로도 볼 수 있다. 지난 4년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해 경제제재를 복원하고,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는 친(親)이스라엘 행보를 보였다. 사우디와도 인권 문제에 눈 감고 대규모로 무기를 판매하며 밀월 관계를 강화해왔는데, 바이든 행정부는 엄격한 동맹관에 따라 이런 정책을 모두 폐기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과 밀착해온 두 나라가 나란히 워싱턴에 정책 일관성 유지를 촉구한 것이란 해석이다.
다만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단기간 내 수교에 합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이 팔레스타인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보다 유연한 편이긴 하지만 사우디의 정통성을 손상하고 권력승계에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는 이스라엘 수교를 무리하게 밀어붙일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