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의 현장에서 낙후한 산업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입력
2020.11.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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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전남 화순 화순탄광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탄핵당하긴 했지만 박근혜가 한국정치에 남긴 중요한 기여가 있다. ‘경제민주화’를 대선공약으로 내걺으로써 민주주의가 단순히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라는 통념을 깨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사상의 자유 등과 관련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생존권과 관련한) ‘경제적 민주주의’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에는 젠더, 성소수자, 가정 내 문제 등과 관련된 일상생활의 민주주의(‘일상성의 민주주의’), ‘작업장 민주주의’도 있다. 직장은 많은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다. 사장의 갖가지 갑질이 그 증거다. 사장이 일을 시키는데 “왜 시켜요”라고 대들면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공장전제정’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공장전제정과 달리,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등 작업장에서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을 작업장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특히 작업장의 주요 결정을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노동자 자주관리’다. 오래 전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실험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소련 등 구사회주의국가들은 ‘노동자의 국가’를 표방했지만 작업장 민주주의 등 노동자들의 권리는 자본주의 국가들보다도 낙후했었다. 반면 북유럽 등에서는 ‘산업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의 참여를 확대시켜 왔다.

전남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너릿재 터널이 있다. 터널 옆 너릿재 공원에는 터널이 생기면서 없어진 옛 길이 있다. 너릿재는 동학혁명 때 농민들이 일본군과 양반군에 의해 죽은 동지의 ‘널(관)’을 끌고 왔다고 해서 생긴 널재가 변한 이름이다. 이곳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 광주의 비극을 들은 화순 시민들이 화순광업소의 다이너마이트와 경찰서의 무기를 싣고 광주로 넘어갔던 지점이다. 공수부대가 미니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의 자주관리운동은 자본가의 소유를 강제로 국유화했던 유고슬라비아와는 다른, 세계사적으로 독특하고 중요한 실험이다. 해방 당시 국내 기업의 90% 이상은 일본인 소유였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 생산시설과 기업들의 주인도 없어졌다. 노동자들은 일본 경영진이 자재나 재고를 빼돌려 일본으로 부를 유출하는 걸 저지하는 한편, 관리자가 없어 멈춰선 생산시설을 작동시켜 생산을 지속했다. 이것이 소극적 의미의 자주관리라면, 적극적 의미의 자주관리는 이들 기업이 노동자들과 민중의 피땀을 수탈한 결과이며 실질적 운영자는 노동자들이라는 관점에서 이뤄졌다.(사실 중도우파에 가까운 임시정부의 강령도 일본 소유, 나아가 우리 기업도 대기업은 국유화한다는 것이었다).

한인기업도 친일기업을 중심으로 이 같은 논리로 자주관리운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45년 11월 초 남한에는 16개의 산별노조에 728개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고 여기에 관련된 노동자가 8만8,000명이었다.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가 바로 화순탄광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세 번째 큰 탄광이었던 화순탄광은 노동자들이 잘 조직화한 결과 일본이 패망하자 바로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탄광을 운영했다. 위원회는 노동자들과 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생산성이 일제 강점기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일제 하에서 2,500명이 한 달 동안 7만8,000톤가량 생산하던 걸 자주관리 체제에선 1,300명이 무려 9만 1,000톤을 생산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목표는 다수 한국민의 의사(미군정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의 80%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불과 13%만이 자본주의를 지지했다)와 상관없이 ‘친미적인 자본주의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을 분쇄해야 했다. 미군은 1945년 11월 초 화순탄광을 점령하고 서울에서 극우인사를 데리고 와 소장으로 앉혔다. 노동조합 간부에겐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통보한 뒤 임금투쟁이나 파업을 벌이면 5년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노조간부 3명을 포함해 노동자 100명을 해고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일제의 국공유재산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겠다고 선포했고 자주관리운동을 불법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공장관리운동이 “미군정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킨다”며 투쟁을 자제시켰다.

하지만 화순의 노동자들은 저항했다. “자치위원회나 노동조합사람들 중에도 똑똑헌 사람이 많은디 해필이면 생판 모르는 외지 사람을 소장이라고 앉히는지 미군 속판을 모르겠네.”(월간 '말'지 1989년 1월호) 노동자들은 1946년 2월 전종업원대회를 열어 ‘소장독재 배격’ ‘최저생활임금 확보’ ‘해직자 복직’ 등을 내걸고 투쟁했다. 8월 15일에는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광주에서 개최된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야기된 식량난과 관련해 ‘더 많은 쌀 배급’과 ‘완전 독립’을 요구하다가 너릿재에서 미군정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조작이라는 말이 많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이어 미군정이 남로당에 대한 탄압에 들어가자 전평은 9월 전국적인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는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과 식량난과 맞물리며 대구의 10월 항쟁을 촉발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저항은 ‘추수봉기’라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어졌고 화순탄광도 파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자세히 서술한 11월 4일 기습검거 작전을 통해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고 탄광을 점령한 뒤 우익인사들로 관제노조를 구성, 탄광을 장악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돼야 했다.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화순 1946’이란 뮤지컬로 만들어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역사적인 해방정국의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미군정의 물리력에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잘못된 정책까지 더해져 1946년 말 완전히 좌초하고 말았다.(보수진영에서는 미군정 덕분에 북한과 소련 같은 길을 피할 수 있었으니 미국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미국이 새로 임명한 친미적인 경영자들은 대부분 이들 기업의 성장과 무관한 사람들로 이승만 정권의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이 회사들을 헐값에 인수했다. 재벌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의 기업들은 ‘경제적 경쟁’이 아니라 정치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산업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국영기업뿐 아니라 민간기업에도 노동자 대표들이 이사회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밖에도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폴란드, 체코, 그리스에서는 국영기업, 그리고 일부 민간기업에 노동자 대표들이 경영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같은 산업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의 주인의식을 제고시켜 오히려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이와 관련, 일부 좌파는 노동자 경영 참여와 산업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본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자주관리운동의 선구자였던 우리는 산업민주주의의 후진국으로 남아 있다. 우리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노동자 경영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모두 당선 후에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경영’은 아직 자본의 고유 권한이고 이에 관한 파업은 불법이다.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노동자들의 의사결정 참여권을 위해 화순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으며 투쟁한 지 75년이 흘렀지만, 우리의 산업민주주의는 간신히 군대식의 ‘병영공장제’를 벗어나 아직 걸음마 단계에도 채 못 나갔다.

경쟁력 등을 이유로 이제는 문을 닫은 사북탄광과 달리 화순탄광은 아직도 건재하다. 화순읍에서 동쪽으로 10여분 달려가면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로 이름이 바뀐 화순탄광이 나타난다. 화순탄광 바로 앞에는 채광 중 목숨을 잃은 광부들을 기리는 광산종사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 앞에 서서 노동자 자주관리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화순탄광의 노동자들을 생각하자 아직도 산업민주주의의 걸음마도 못 떼고 있는 현실에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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