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대 멘 김진표...'日자산 현금화 유예론'에 담긴 속내는?

입력
2020.11.20 04:30
8면
문재인 정부, 사법 절차 개입 불가 원칙 속 
도쿄 올림픽까지 한시적 유예론 띄워 
사법부에 "도쿄올림픽 까지 속도 늦춰달라"는 메시지


여당이 최근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띄우고 있는 '일본 기업 자산의 매각(현금화) 절차 유예안'은 현금화 절차 속도의 키를 쥔 사법부를 향한 고공 메시지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사법 절차에 직접 개입하거나 발언을 하기 어려운 만큼 당이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7월까진 현금화 절차에 속도를 내지 말아 달라"는 암묵적 메시지로 사법부와의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예론은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를 만난 김 의원은 지난 14일 도쿄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가급적이면 모든 한일 현안을 일괄 타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이 안 되면 징용 문제는 현 상태에서 더 악화하지 않도록 봉합하고 징용 외 도쿄올림픽 협력 등을 하자"고 말했다. 17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도쿄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7~8개월 간 동결하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했다"면서 연일 현금화 절차 '유예'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의원은 그러나 현금화 유예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외교가에선 "정부가 사법부에 매각 절차를 늦춰달라고 직접 얘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김 의원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절차는 대법원의 일제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따른 것으로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법의 영역'이다. 이 절차를 늦추기 위해선 사법부가 자체 판단으로 진행 속도를 조절하거나 소송 원고 측이 동의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특히 정부가 사법부에 매각 절차를 늦춰달라고 요구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사법 농단 사건이 재연될 수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건과 관련한 재판 거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아울러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현 정부로선 강제동원 피해자 측에도 현금화를 유예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피해자들과의 만남 자체가 '현금화 절차 완급 조절에 동의해 달라'는 정부 차원의 압박으로 비쳐질 수 있다. 현재로선 현금화 유예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의원이 연신 '현금화 유예론'을 거론한 것은 결국 정부를 대신해 사법부에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란 게 정부 안팎의 해석이다. 정부 측은 김 의원이 띄운 '현금화 유예론'에 거리를 두면서도 은근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한일 간 협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정부 소식통은 19일 "행정부 입장에선 사법 절차에 당연히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하지도 않을 것"며 "피해자들과의 접촉도 매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다만 "한일관계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법부가 최근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 움직임을 보면서 재량껏 판단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로선 사법부가 정무적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김 의원 측은 이 같은 메시지가 사법부에 대한 압박으로 비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하는 표정이다. 김진표 의원실 관계자는 "유예론을 언급한 건 여러 절차상 내년 7월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는 뜻이었다"면서 "사법부나 피해자 측을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보낼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여권이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현금화 유예론을 띄우고 있지만 일본은 이 같은 모호한 성격의 유예로는 어림도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한국 사법부가 현금화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 차원의 확실한 보증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 정부 내에선 위안부 합의 파기 등에 따른 한국에 대한 불신감이 극도로 커진 상황"이라면서 "스가 총리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영빈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