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출처인 영화 ‘봄날은 간다’보다 유명한 대사다. 사랑이란 언제라도 금세 변해버릴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영화가 나온 2001년만 해도 사랑의 고정성에 집착하는 순진함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젠 다르다. 최대한 간결하게 이별해야 ‘쿨하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사랑은 점점 더 쉽게 끝나거나 ‘썸’이라는 형식으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채 없어진다.
모로코 출신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책 제목에서 사랑이 왜 끝나는지 묻는다. ‘어떻게’라며 탄식하는 유지태의 하소연을 감정사회학의 틀로 분석해 ‘왜’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일루즈는 이미 앞선 저작 ‘감정 자본주의’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은 왜 불안한가’ 등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감정’과 ‘사랑’에 사회적 문제가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현대의 산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 산업, 노동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거시적 관점에서 주목할 때 일루즈는 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개인의 감정과 사랑의 관계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려 한다.
2년 전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관계가 끝나는 과정,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이별에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돕는 자기계발서나 심리학 서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난해한 학술용어가 수시로 등장하니 같은 문장을 몇 번씩 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저자는 사랑을 정의하거나 이별의 과정과 원인을 밝히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앞선 저작에선 사랑하는 대상의 선택이 본래 무엇을 뜻하는지, 이 선택의 구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조명했다. 이번엔 선택의 다른 범주에 주목한다. 그건 ‘선택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다. 관계가 어떤 단계에 있든 개인이 원하는 대로 관계를 끝내는 자유를 말한다.
사랑을 끝냄, 사랑이 끝남, 사랑의 부재. 이는 민주주의가 성취해낸 자유와 관련이 깊다. 감정적 측면의 사랑과 육체적 측면의 사랑에 자유가 부여된 건 역사상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성적 자유는 기존의 규범과 제도를 흔들었다. 만남과 이별은 쉬워지고 이혼과 비혼은 흔해졌다. 페미니즘은 성적 자유가 여성을 구속에서 해방하고 양성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자유주의에 동조했다. 개인의 자유 신장과 함께 후견인의 자산인 양 취급되던 여성의 몸에 대한 소유권이 여성 자신에게 돌아가는 성과도 있었다. 그렇다면 성적 자유를 정말 현대인의 자아 해방으로 볼 수 있을까. 저자는 여성해방운동의 성취를 소중히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자유에 대해 보다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성적 자유가 사생활의 첫째 원칙이니 서로 배려하는 상호성의 의무 따윈 져버리라고 꼬드긴다. 이렇게 조장된 성적 자유는 남성과 여성 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랑은 두 사람 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란 포장은 감정의 불평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불평등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한다. 자유가 기존의 강력한 시스템인 젠더 불평등과 관련해 작동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일반적인 연인, 부부 관계뿐 아니라 계약 연애, 일회적 섹스, 데이트 앱을 통한 만남, 성매매, 포르노그래피까지 다양한 관계에서 자유라는 명분 속에서 젠더 불평등이 발생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불평등은 관계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강화한다.
사랑은 시장에서 물건이 거래되듯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이 된다. 암묵적 거래와 교환을 통해 사랑이 이뤄지는 현실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가치로 환산된 여성의 몸은 종종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한편 사회적 지위를 뒷받침하는 지표로 기능한다. 소비 주체로서 연인들은 각종 레저 산업의 타깃이 된다. 소비 취향은 사랑의 상대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인 한편 상대와 관계를 끝내는 손쉬운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회는 이처럼 섹슈얼리티와 사랑을 계속 시장으로 내몰면서 자율성을 내세워 상품화를 정당화한다.
저자는 긍정적 선택과 부정적 선택이 긴밀히 연관돼 작동하며 관계를 쉽게 끝나도록 하는 역동성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의 기술 발달은 성적 선택을 사실상 무한대로 넓혀 놓았다. 그 덕에 인간은 상실의 두려움을 시장의 기술과 소비력으로 손쉽게 이겨낸다. 접속 과잉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선택을 미루거나 회피한다. 애정 관계에서도 감정과 신뢰에 집중하기보다는 순간적 쾌락에서 의미를 찾는다. 곧 경제와 기술이 ‘사랑하지 않음, 사랑의 끝냄을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이렇든 사람들은 섹슈얼리티, 욕망, 자율성, 소비 정체성, 감정적 확실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존 관계를 끝내고 새로운 관계로 계속 옮겨간다.
이 책은 윤리학 서적이 아니다. 사랑이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의무를 다하는 관계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자유 안에 있는 여러 지류가 충돌하는 모순을 짚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제한하자고 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저자는 그저 현실에 숨은 애매함과 모순을 찾아내 토론의 단상에 세우려 했다고 말한다. 이론만 내세우는 건 아니다. 저자는 구체적 이해를 돕고자 19~72세 성인 92명을 인터뷰한 사례를 인용해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성적ㆍ낭만적 관계를 유동적이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해명한다. 사랑이 자신의 순수한 주체적 감정과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