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에스트로 오스모 벤스케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한 뒤 1주일 만의 공연이었다. 서울시향과는 6년 만의 만남이기도 했지만,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2번은 곡 자체로도 처음 연주한 작품이었다. 새로운 곡을 연주한다는 건, 곡의 난이도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는 탐험가가 되는 기분이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선다.
처음 마주하는 곡의 연주를 준비한다는 건, 비유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차박캠핑'을 떠나는 일과 비슷하다. 홀로, 혹은 가족 단위로 단출하게 떠나는 소규모 여행이지만, 그 준비물은 어마어마 하다. 그 많은 장비와 짐을 챙기다보면 이럴 바에야 차라리 호텔에서 예약해 푹 쉬는 게 더 나아보인다. 하지만 캠핑 준비는,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적당한 동선과 스케줄을 짜는 일은 분주하면서도 즐겁다. 준비 과정 그 자체가 이미 즐거운 것이다. 준비를 잘 할수록 여행은 즐거워지는 법이니까.
연주회 전에 연습을 한다는 건 늘 그렇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루는 호로비츠가 악보를 앞에 두고 너무 즐거워해 제자들이 이유를 물었단다. 그러자 호로비츠는 아이처럼 기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이 곡을 연주하면서 무심코 지나갔던 음표를 오늘 처음으로 찾아냈거든." 악보에는 연주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걸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얼마나 열심히 악보를 읽느냐에 달려 있다. 정말로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보면 작곡가의 의도가 3D 입체화면을 보듯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겠다’며 농담을 하시곤 했다.
새로운 곡은 더 그렇다. 처음엔 마치 새 친구를 사귈 때처럼 서먹서먹한 기분이 든다. 그건 단순히 음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곡가와 작품의 배경 지식까지 이해해야만 그 곡을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건 내 연주에 확신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서울시향과 협연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쇼팽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으며 피아니스트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작곡가가 27세에 1번을 지은 뒤, 24년이라는 공백 뒤에 만든 두 번째 협주곡이다. 1번을 작곡하고 스스로도 '너무 훌륭하다'고 자평했던 쇼스타코비치가 굳이 24년 뒤 또 다른 곡을 쓴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 이유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아들의 모스크바음악원 졸업 선물로 주려고 쓴 곡이다. 모스크바음악원 졸업 연주에서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곡을 연주하는 아들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보니 꼭 내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훗날 지인에게 이 작품을 두고 '예술적 가치가 그리 높지는 않다’고 혹평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만으로도 가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음악적 표현, 예술적 가치가 다소 부족하다 한들 또 어떤가. 이 곡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