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진료실의 문이 열린다.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 사람의 가장 아프고 힘든 시간이 걸어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에 공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서울 은평구에 자리하고 있는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의 에세이집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2020)은 이렇게 시작한다.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받아 본 적이 있는 나는 이 문장에서 이미 눈물이 터졌다. 나의 아픈 시간을 저와 같은 마음으로 봐 준 사람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먹먹한 마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책을 펴기 전까지는 '왕진 가방'도 '페미니즘'도 그저 귀여운 은유인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추혜인 원장은 진짜로 일주일에 한 번 마을로 왕진을 나간다. 그 길에 들고 가는 가방에는 “페미니즘이 들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에게 페미니즘이란 한 사람의 몸과 마음, 사정을 정성 들여 들여다보되, 그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전체로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다른 이름이 바로 그가 말하는 '공명'이다.
그의 의술의 시작에는 페미니즘이 있었다.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1996년, 그는 자원활동을 하던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를 해 줄 여성 의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곧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한다. 그리고 의대에 재입학했다. 책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험들은, 페미니스트로서 훈련한 예민한 감수성이 의사로서 내리는 판단에 어떤 정교함을 더해 주었는지 가늠하게 해 준다.
추 원장이 가정의학과를 선택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대한 묘사 역시 인상적이다. 한 의학 콘퍼런스에서 가정의학과 전공의가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고 있었다. 70대 어르신이 1년 전부터 혈변이 나와 병원을 찾았고, 그 전공의가 대장암을 진단하여 생명을 구했다는 훈훈한 이야기.
하지만 에피소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발표를 듣고 있던 가정의학과 교수가 질문을 던진 것이다. “1년째 혈변을 보았는데 왜 더 일찍 검사를 받으러 오지 않으셨나? 그에게 가족은 있나? 그가 수술 후 잘 살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추 원장은 이처럼 “환자의 삶을 통합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야말로 가정의학과의 진수라고 설명한다.
페미니즘과 가정의학이 만나는 자리에 관계성이라는 키워드가 놓여 있다. 그가 행하는 의술은 때로 ‘줌인’과 ‘줌아웃’의 기술이 맞물려 있는 아름다운 기예처럼 보였다. 세밀한 곳까지 깊게 파고들었다가 쑥 빠져나와 병이 놓여있는 맥락을 함께 살피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사로서의 식견을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상상력과 연결시킨다.
치매와 마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는 이런 유연하고 확장적인 과정을 잘 보여 주었다. 대학병원에서 일할 때, 그는 한 치매 할머니의 주치의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할머니를 보살피는 마음에 비해, 할머니의 치매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알고 보니,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할머니가 마을 공동체를 잃었고, 그런 상황에서 치매가 급격하게 진행된 것이다. 추 원장은 이 케이스를 보면서, 어떻게 골목과 가게들을 지키고, 마을을 보존할지 생각한다.
개별 신체의 특수성에 주목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특히 낙태죄에서처럼 여성 신체를 이유로 시민권을 부정당하는 시절에 “나의 몸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크다. 하지만 신체가 소유물로 감각되고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본질주의와 만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때로 나와 다른 신체에 대한 부정이나 거부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체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떻게 차이들을 연결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면서 뚜벅뚜벅 나아가는 추 원장의 의술이 영감을 준다. 줌인과 줌아웃의 공명의 페미니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