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잘못한 것인게 살게 해주것제. 시방 세상이 좋은 세월인디 죽기야 허것는가." 지난 8월 수해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전남 구례군 섬진강 피해 주민 수백 명이 18일 오후 구례 5일장에 모였다. 수해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나도록 사과 한 마디 없고,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작태를 성토하기 위해서였다. 성난 주민들은 "정부는 거짓말을 그만 하고 당장 약속을 지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섬진강 수해 참사 피해자 구례군비상대책위원회와 소상공인, 주민 250여명은 이날 구례 5일장 일대에서 책임자 처벌과 수해 피해 배상 촉구 궐기대회를 열었다. 주민들은 '절망과 분노' 난타공연과 '구례가 수장된 그날 되돌아보기' 전시회 및 증언, 수해 당시 5일장의 긴박한 대피 상황을 재현했다. 주민들은 미리 준비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정부 규탄 구호를 외치고 호루라기 불며 함성을 외쳤다.
시장 상인들은 정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모든 점포에 현수막을 일제히 내걸었으며 가게 셔터를 내린 뒤 영업을 일시 중단하고 궐기현장에 참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환경부와 국토교통부, 홍수통제소 등 문구를 쓴 판에 물풍선을 투척하기도 했고 대책위 일부 대표들은 삭발을 하며 강력 항의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순호 구례군수와 유시문 군의장 등도 동참해 주민과 뜻을 함께했다.
주민들은 "멀쩡하게 물건을 팔고 평온하게 농사를 짓고 애지중지 가축을 키우며 지내온 일상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며 "그동안 청와대와 국회, 환경부, 감사원 등을 찾아 수해참사는 인재임을 밝혀달라고 촉구했지만 100일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해결된 것은 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다"며 "정부와 수자원공사, 환경부는 무(無)사과, 무(無)조사, 무(無)처벌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책위는 "피해액의 10분의1도 보상받지 못한 곳이 섬진강 구례"라며 "곧 다가올 한파를 견뎌낼 생각에 앞이 막막하다. 대통령도 여야 대표도 수해현장에 다녀만 가고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결국 주민들을 속인 것 아니냐. 어차피 우리는 수해 때 죽은 목숨이었다. 우리는 배상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성토했다.
구례읍은 지난 8월 7일부터 이틀간 내린 폭우와 상류지역 댐 방류로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 둑이 터지면서 읍내 40%가 물에 잠기고 1,800억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1,14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은 임시 조립주택에서 지내고 있다. 농경지 502㏊와 비닐하우스 546동이 피해를 봤고 가축 1만5,846마리가 폐사하거나 물에 떠내려갔다. 상하수도사업소가 완전히 침수돼 하수처리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고 공원, 복지관, 예술회관 등 공공시설이 물에 잠겼다.
환경부는 섬진강 수해 원인 조사에 나섰다가 '셀프조사' 비판을 받고 피해주민과 국토부, 행정안전부가 참여한 조사협의체를 새로 꾸렸다. 수해원인조사협의회는 지난 16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1차 회의를 열고 조사 용역 발주를 비롯해 조사 결과에 따른 배상 절차, 책임자 처벌 등을 논의했다. 수해 피해 조사는 내년 1월 착수해 6월쯤 완료할 계획이다.
대책위 관계자는 "정부는 인재와 자연재해라는 모호한 경계를 핑계로 이렇다 할 보상은커녕 사과 한 마디 없고 정치권도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현실에 주민들은 힘을 잃어 가고 있다"며 "100일이 지나도록 수해 원인 조사조차 않는 정부는 각성하고 수해참사 재발방지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