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원정

입력
2020.11.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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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멕시코 국가대표 평가전이 열린 15일 새벽, TV중계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처럼의 A매치인데다 최근 프리미어리그에서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 손흥민도 나온 경기지만 내내 걱정이 앞섰다. 경기 직전 뜻밖의 소식 때문이다. 우리 대표팀 중 6명의 선수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것.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낯빛은 어두워 보였다. 손흥민의 패스를 받아 황의조의 선제골이 들어갔을 때도 선수들은 맘껏 기뻐하지 못했고, 어색하게 서로의 주먹만 부딪고 말았다.

국내 스포츠에서 코로나19 감염 사례가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 국가대표팀이 집단 감염된 건 처음이다. 스포츠 방역에 그토록 공을 들였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축구 대표팀에서 뻥 뚫리고 말았다.

대한축구협회가 오스트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9월초 당시 오스트리아 하루 확진자는 200명 안팎에 불과했다. 하지만 원정이 공식 발표된 10월 13일 하루 확진자가 979명에 달하더니, 최근에는 하루 1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위험해졌다. 급기야 오스트리아 정부는 17일부터 3주간 봉쇄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축구협회가 그 위험한 곳으로 원정을 강행한 이유는 복잡하다. 코로나19 여파로 1년간 단 한 차례의 A매치도 진행하지 못했다. 지난 10월 국내에서 올림픽 축구대표팀과 평가전이 열렸지만 핵심 전력인 유럽파가 빠진 무대였다. 월드컵 지역예선을 앞둔 파울루 벤투 감독으로선 팀의 전력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협회의 재정 문제도 절박했다. A매치는 축구협회의 주 수입원이다. 큰 돈 내놓은 스폰서를 노출시킬 수 있는 기회다. A매치를 열지 못하면서 중계권료와 입장권 수입이 사라졌고, 공식후원사의 수백억원대 후원금까지 날아갈 위기였다고 한다. 화려한 스포츠 이면엔 잔인한 주판알의 셈법이 지배한다.

축구협회는 국내 체육종목단체 중 제일 부자다. 2018년 대한체육회 자료에 따르면 축구협회는 자체 수입 총액이 728억원으로 압도적 1위였다. 재정자립도도 76%로 상대적으로 넉넉했다. 살림살이가 컸기에 코로나19 피해가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축구협회가 결국 빈 곳간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 원정을 강행했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국가대표의 자부심을 안고 원정을 떠났다가 느닷없이 코로나에 걸린 선수들은 현지 숙소에 격리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조현우가 확진 판정을 받으며 소속팀 울산은 코앞에 닥친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대비에 빨간불이 켜졌다. 국가대표가 아무리 큰 명예라 해도, 국가대표란 이유로 선수들에게 이런 희생까지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축구협회는 불가피한 원정이었고 이번 A매치 기간 우리만 유럽에 간 게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을 코로나 대유행의 한복판으로 한데 모은 이번 원정이 안전할 거란 맹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주요 전력이 코로나로 제외돼 최상의 합을 맞춰보지도 못한 이번 원정에서 벤투호는 과연 무슨 이득을 얻었을까. 국민들은 평가전 결과엔 관심 없다. 그저 소중한 우리 선수들이 무사귀환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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