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까지 공유해온 삶의 패턴이 결과적으로 빚어낸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비유는 주목할 만하다. 역사상 유례 없는 생산력과 소비증대를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형태가 바뀔 뿐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 플라스틱은 이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 '플라스틱맨'이 생태, 환경 위기를 경고하는 작품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백민석의 ‘플라스틱’은 물질이라기보다 인간(man) 내부에 누적된 일종의 집단심리적 엔트로피를 가리키는 데 더 가깝다. 여기서 생태, 환경의 위기와 ‘인간성’의 위기 중 무엇이 더 근본적인 문제인지 따져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들은 자본주의 문명이 만들어낸 쌍생아이다. 소설 속 테러 협박범인 플라스틱맨도 “날 나로 만든 게 누굴까?”라고 자문한 뒤 “바로 자본 독재, 너희들”(215면)이라고 덧붙인 바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 정도 통찰력”(215면)을 새삼스럽게 전시하는 데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오히려 소설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개그처럼 받아들여진다. 모두가 그 끝을 알면서도 어떻게 손써볼 수 없는 거대한 패턴이 삶과 현실을 여전히 규율하고 있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싶지만 소설 속의 일상은 그러한 불안 가운데서도 어떤 면에서 안온하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문명비판조차 개그로 소비해버리는 패턴의 힘을 역설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활용한 장치가 바로 이 소설의 ‘대체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기각되었다는 가정 아래 쓰인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사건과 배경뿐 아니라 많은 구성요소들을 ‘대체’하고 있거니와 일반적으로 남성주인공 일변도라 할 형사물에 여성주인공 하윤임 경감을 내세웠다. “나라를 위해 낮에는 경찰서에서, 밤에는 광화문광장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자부심”(27면)은 사회적 혼돈과 테러의 지속 가운데 무력감으로 바뀌어 하경감은 끝내 사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닐 것이다. ‘플라스틱맨’의 ‘맨’은 남성을 의미하는 명사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탄핵을 기각한 사법이나 하경감을 가장자리로 내몬 경찰조직이 그렇듯 국가기구의 ‘남성성’은 이 대체역사 안에서도 의연하다. 따라서 주인공 하경감은 남성들의 질서와 ‘가짜 역사’에서 스스로 이탈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끝에서 끝을 이어갈”(250면) ‘가짜 역사’의 궤도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촛불항쟁의 실제 장면을 찍은 사진들을 텍스트와 함께 배치한 작품의 구성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우리의 시대가 새로운 질문을 시작할 장소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