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피해자" 안인득, 다섯번 면담끝에 속 드러냈다

입력
2020.11.23 04:30
12면
[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8> 안인득 방화 살인 사건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진주에 사건 났다, 빨리 가 봐라.”

지난해 4월 17일 동이 틀 무렵, 경남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 방원우(39) 경사는 현장 투입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진주로 달려갔다. 몇 시간 전인 오전 4시 30분쯤 진주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한 남성이 대피하던 아파트 주민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사망자 5명, 부상자 17명. 바로 안인득 방화 살인사건이었다.

방화와 살인의 증거가 명백하고, 수많은 목격자가 있으며 이미 피의자까지 검거된 상황이었다. 언뜻 프로파일링이 필요없는 사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대체 왜? 프로파일러는 이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했다.

안인득의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경찰에 붙잡힌 안인득은 횡설수설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수년간 병원에서 임상심리사로서 환자들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다 경찰관으로 전직한 방 경사가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방 경사는 해답을 얻기 위해 면담실에서 안인득과 마주 앉았다.

진술 반복, 수사는 도돌이표

체포 당시부터 안인득과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는 “내가 바로 피해자이고, 나는 나를 괴롭히는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안인득이 내뱉는 말은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기분이 어떤가" "칼에 베인 손가락은 괜찮은가"라고 물어봤지만, 이 물음엔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또 "누구도 나를 돕지 않아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되돌아갔다.

방 경사는 처음에 안인득이 거짓으로 진술한다고 의심했다. 감형을 염두에 두고 정신 질환자인 것처럼 연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안인득은 자기 범행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감형을 노린다고 보기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면담 30분 만에 방 경사는 안인득이 가진 질환을 망상 장애(실제 사실과 다른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는 것)로 진단했다. 망상 증상이 심해질 경우 질환자는 전혀 연관성 없는 사회적 갈등이나 피해 사실을 자신의 상황과 결부시킨다. 안인득이 언론을 향해 "국정농단은 나를 해하려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다"는 등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것이 바로 망상 장애의 증거였다.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 사고를 접목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인득은 통상의 조현병(정신분열병·인격의 여러 측면에서 광범위한 이상 증상을 일으키는 정신 질환) 환자와는 달랐다. 조현병 환자는 개인 위생관리가 잘 안 되거나 대화 방식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인득의 경우엔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등 위생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방 경사는 “안인득은 외관상 정신 질환자라기보다, 화가 많이 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범행 장면까지 똑똑히 기억하는 안인득에게서 죄의식과 윤리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 경사는 “안인득은 본능적으로 노인, 여성, 어린이 등 자신보다 약한 사람만 공격했다”며 “피해자에게 잠깐 미안함을 표하고는 다시 10여 년 전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고 분석했다. 안인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안의 폐쇄적 사고에 갇혀 있었다.

입을 열기 시작한 안인득


이튿날 두 번째 만남에서 방 경사가 인사를 건네자 안인득은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방 경사는 “이야기를 들어주니 자기 편에 서는 것처럼 인식했다”며 “주변에서 자신을 괴롭힌다는 ‘세력’과 나를 다르게 보았다”고 되짚었다. 신뢰와 친밀감(라포)이 형성되자, 안인득은 감췄던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했다.

세 번째 면담 때 안인득은 학창시절 일화들을 꺼냈다. 운동을 배우고 또래에 비해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회상부터, 중학생 때 괴롭힘을 당하던 약한 친구를 위해 대신 나서기도 했다는 내용까지. 방 경사는 “과거에는 증상이 없었다는 확신이 들 만큼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능했다”고 회고한다. 또한 “정의롭다는 결론에 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겸연쩍고 쑥스러운 모습을 보였기에 거짓말이 아닐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4회차 면담에선 안인득이 자기 증상을 자세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당신을 어떻게 괴롭혔느냐"는 질문에 안인득은 “윗집에서 뿌린 독충이 천장과 벽 등 집안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답했다. 입원 경험이 있는 정신 질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묘사하길 꺼려한다. 주변에서 정신 질환자로 취급하고 더는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다. 그러나 안인득은 “독충의 종류가 다양하고, 빨리 움직여서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설명했다. 기나긴 면담 끝에 안인득이 망상 장애와 조현병은 물론, 환시(실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것) 증상도 가지고 있다는 걸 밝혀냈다.

한창 분풀이를 하다가, 가족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인득의 말수는 급격히 줄었다. 안인득은 "부친과 함께 살다가 문제가 있어 떨어져 살게 됐다" "형님과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등 객관적 상황만 묘사했다. 가족과의 친밀감이나 정서적 교감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프로파일러가 바라본 안인득은 '현실을 검증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일상생활에 적응하는 능력은 충분한 사람'이었다. 범행 전 다른 집을 방문해 항의하거나, 현관문에 오물을 붓는 등 위력을 과시했다는 점으로 볼 때 자기 불만을 표출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능력은 있었다. 반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진 상태였다.

5번의 면담, 굳어진 확신

5일 연속 이어진 진술 끝에 방 경사는 안인득이 정신 질환자가 맞다고 결론 내렸다. 자기 증상에 매몰돼 일반적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진술에 일관성이 있었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안인득은 진심으로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을 공격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안인득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체육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친형의 진술을 보면 안인득은 2008년 상차(上車)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쳤지만 일용직 하청업체 소속이라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안인득의 망상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인득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2010년 안인득은 "자신을 감시한다"며 다른 사람에게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혔다. 치료감호소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이듬해 강제로 입원 당했다. 9개월 후 퇴원하고는 굴삭기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잠시 경제활동도 했다. 한 달에 한번 진료를 받기도 했으나 2016년 7월 이후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범행 직전의 행적을 보면 행동의 공격성이 점점 뚜렷해졌다. 2018년 아파트 내에 여러 차례 오물을 투척했고, 사건 3개월 전인 지난해 1월에는 "약을 탄 커피를 줬다"며 자활센터 직원을 폭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안인득은 흉기를 구입했고, 범행 3시간 전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매하며 범행을 계획했다. 방 경사는 “피해 망상이 있으면 공격성을 띄기 쉽다”며 “관리되지 않은 기간도 길고, 망상 증상도 있어 범행할 환경이 맞아 떨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창원지법 1심은 안인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심신 미약을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킬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범행을 오롯이 피고인만의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안인득의 무기징역형은 지난달 29일 확정됐다.

김진웅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