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주도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8년 산고 끝에 15일 닻을 올렸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맞서 중국이 먼저 글로벌 경제블록을 재편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반격이 거셀 전망이다.
한중일 3개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호주와 뉴질랜드 등 15개국 정상들은 이날 RCEP에 서명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아우르는 초대형 FTA의 출범을 공식화했다. 회원국 국내총생산(GDP)을 합하면 26조3,000억달러(약 2경9,285조원)로 전 세계 GDP의 32%에 달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약 2경7,058조원)과 유럽연합(EU·약 1경8,298조원)을 능가하는 규모다. 서명을 미룬 인도까지 가세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36억명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는 셈이다.
RCEP는 관세 인하, 원산지 기준 통일, 전자상거래 규범 체계화 등을 목표로 한다. 아태 지역 GDP의 2.1%, 글로벌 GDP의 1.4%가 증가할 전망이다. 회원국 간 무역과 투자 규모는 각각 전 세계의 29.1%와 32.5%에 이른다. 션밍후이(沈銘輝) 중국 사회과학원 아태·글로벌센터 소장은 "RCEP는 한중일 FTA 체결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다층 FTA로 한미일 3각 협력의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이 RCEP를 통해 시장을 넓혀 대중 의존도를 높이면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S&P 글로벌 신용평가의 숀 로치 아태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통신에 "보호무역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RCEP를 성공시킨 건 '외교적 쿠데타'"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포위 정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RCEP에 서명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발전 잠재력이 가장 큰 FTA"라며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성과이자 다자주의·자유무역의 승리"라고 강조했다. 실제 중국은 한중일 3국이 모두 공을 들이는 아세안과의 교역에서 한참 앞서 있다. 2009년 이래 아세안의 최대 교역국 자리를 지키고 있고, 특히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미중 간 교역이 줄면서 아세안이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최대 교역국이 됐다. 관영 환구시보는 "아시아 국가들의 RCEP 참여는 더 이상 맹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RCEP는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아시아 회귀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맞서 중국이 내놓은 맞불카드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TPP를 탈퇴하면서 아태 지역의 독보적인 경제블록으로 급부상했다.
RCEP 출범으로 당장은 중국 우위의 경제블록이 형성됐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TPP에 복귀할 경우 또 다른 패권 경쟁으로 흐를 수 있다. 미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은 "RCEP와 TPP가 아시아의 무역·투자 기준을 두고 경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중국 매체들은 "미국이 TPP를 앞세워 중국을 포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TPP는 미국 탈퇴 이후 일본을 비롯한 11개국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이름을 바꿔 2018년 12월 출범했다.
중국을 더 애태우는 건 막판에 발을 뺀 인도다. 인도는 RCEP 협상에 참여했지만 서명은 거부했다. 대중 무역적자 급증, 국경 분쟁, 농업·제조업 타격 우려 등을 감안해서다. 중국은 내년 RCEP 공식 출범 전 인도가 참여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인도는 세계화에 합류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