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땅 빼앗길 뻔한 노비의 억울함, 조선은 무시하지 않았다

입력
2020.11.16 09:30
조선시대 법 감정 연구한 '정의의 감정들' 저자  
김지수 조지워싱턴대 교수 이메일 인터뷰


“소인이 세상에서 당한 원통한 사정(寃情)을 감히 아룁니다.”

경오년(庚午年) 2월, 말금이라는 이름의 여자 노비가 고을 수령에게 낸 ‘소지(所志·관부에 올리는 소장, 청원서, 진정서 등을 일컫는 말)는 절절한 호소로 시작한다. 사정은 이랬다. 말금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았다. 헌데 남편의 친족이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남편이 남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자, 억울했던 말금이 맞소송에 나선 것. 수령은 토지대장을 조사한 끝에 친족이 토지소유권을 위조했다며 체포하고, 말금의 토지 소유를 인정해줬다.

때는 신분제와 남녀 차별이 공고했던 조선시대. 계급으로 따지면 맨 아래, 꼬리칸 승객인 여자 노비가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을 관(官)에 법적으로 호소해 구제받았다니. 놀랍지만 사실이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김지수 교수는 신간 ‘정의의 감정들’에서 조선시대 국가에 억울함을 제기한 소원(訴寃·원통함을 하소연함) 600여건을 분석해 여자 노비뿐 아니라 기생까지 미천한 신분의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권리를 행사했다는 걸 보여준다.

당시엔 조선의 사법제도의 롤모델이었던 중국만 해도, 여성에겐 법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서구 국가에서도 노예들은 공공장소나 법정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게 금지됐던 시대였다. 그런데 조선의 왕들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의 분노를 공론화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조선 건국 9년 만인 1401년 태종은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북을 치도록 만들었고, 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징을 치는 일도 허용했다.



이메일로 만난 김 교수는 조선시대 사법체계가 ‘원(怨)’, 즉 원통함을 풀어주는 데 최우선 가치를 뒀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서구의 나라들이 법적 담론에서 이성과 감정을 철저히 구분 지으며, 감정을 하찮은 가치로 깔아뭉갰던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은 감정을 핵심으로 봤다.

“조선 위정자들에겐 백성들의 억울한 감정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쁜 기가 축적돼 화기를 해치고, 결국 사회 법 질서뿐만 아니라 우주의 질서마저도 해쳐서 가뭄 같은 자연재해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고가 있었어요. 전체 백성의 억울한 감정을 해소시키는 게 곧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고, 그래야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거죠.”

물론 체제 유지란 정치적 노림수가 컸다. 자애로운 성군 이미지를 통한 통치 권력의 정당화, 신분질서의 전복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모든 백성을 감정을 느끼는 '인간'”으로 인정하고 “모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국가의 중요한 의무”라는 민본사상을 깨닫고 있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고 강조했다.

소원 제도가 경직된 조선 사회에 균열을 일으킨 것도 성과다. 한글이 만들어진 16세기 이후부터 여성들은 소지를 쓸 때 한글로 적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 두고 김 교수는 “공적 글쓰기인 한문을 쓰지 않은 건 기성체제에 대한 여성들의 주체적인 도전”이라 해석했다. 수령을 고소할 수 있다는 조항 등 조선 전기엔 허용되지 않았던 '불법'들이 백성들의 요구로 합법화 된 사례도 적지 않다.

“국가가 백성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되면 결국 반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국민이 끊임 없이 억울함을 소통할 수 있는 법 공간이 존재했다는 것은 오늘날 사법체계와 나라를 운영하는 데 중요하게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세종도 똑같이 말했다. “만일 백성의 ‘원’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정치하는 도리(道)이겠는가?” 민생고로 힘들어하는 백성들의 억울함엔 눈 감은 채 사탕발림 구호와 공허한 약속들로 민심을 사려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새겨들어야 말이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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