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자.”
오래 전 1990년대 약품 포장재 겉에 표시됐던 경고 문구다. 그러나 ‘약 권하는 사회’는 여전하다. 오히려 갈수록 약은 더 많이 팔린다.
물론 현대인이 더 오래 살게 된 건 분명 약 덕분이다. “옛날 사람들은 심장병이나 암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런 병에 걸릴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세계를 뒤덮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해법이 나올 거라고 우리는 믿는다. 마침 엊그제 자사 백신이 코로나19 예방에 90% 이상 효과를 발휘했다는 임상 시험 결과를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가 발표했고, 세계는 환호했다.
1년 만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텐 드럭스’는 ‘의학사를 바꾼 10가지 약물들’을 다룬 책이다. 약물의 탄생 및 진화 과정이 주요 테마다. 말하자면 약에 얽힌 이야기다. 저자는 소설 작법을 따른다. “내가 선호하는 건 생생한 스토리와 기억할 만한 캐릭터”라고 밝힐 정도로 노골적이다.
소개할 약을 고를 때 쓴 기준을 봐도 그렇다. 역사적 중요성만 고려한 게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적 가치 역시 대등하게 따졌다는 게 저자 고백이다. ‘역사상 최고 히트작’에 들어가는 아스피린과 페니실린이 목록에서 제외된 것도 “식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학책’의 기본인 정보가 도외시되는 것도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엄청난 흡인력을 가진 과학책”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잘 쓰인 매력 만점의 약 연대기”라고 칭찬했다. 지식과 재미, 모두 잡았다는 뜻이다. 역사적ㆍ현재적 사실과 더불어 풍부한 배경ㆍ맥락 정보가 흥미로운 이야기의 토대를 이룬다.
이만큼도 괜찮다. 하지만 또 있다. 메시지로 책은 완성된다. “제약회사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기지만, 많은 사람은 필요한 약을 구입할 여력이 없다.” 저자가 더 보여주고 싶은 건 ‘자본 논리에 휘둘리는 과학’이다.
가령 지금 코로나19 백신을 개발 중인 화이자의 블록버스터 ‘비아그라’와 ‘쎄레브렉스’는 질병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한다. 발기장애와 관절병은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복약이 중단되면 재발하는 증상이다. 끊임없는 처방은 끊임없는 수익으로 연결된다. “이윤 추구는 개발될 약물의 종류를 왜곡시킨다”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책에는 페미니즘 시각도 얼마간 녹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예견이라도 한 듯 저자는 천연두 백신 개발 과정을 비중 있게 소개했는데 부각되는 인물이 ‘백신의 아버지’로 유명한 에드워드 제너가 아니라 생소한 여성인 ‘레이디 몬태규’다. ‘허스토리’(herstory)의 발굴만으로도 남성에 치우친 역사(history)의 불균형이 완화한다.
저자 토머스 헤이거는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지적인 이야기’나 ‘픽션 같은 논픽션’은 저널리즘의 미래다. 책이 번역자를 잘 만났다. 지난해 번역 부문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자인 양병찬은 경영학을 전공한 약사였다. 그 덕에 약학의 배후에서 요동치는 거대 자본의 논리를 늘 염두에 둘 수 있었다고 그는 후기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