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고 싶을 뿐이다

입력
2020.11.12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오토바이 천국’으로 불리는 베트남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열악한 교통 환경과 관련된 풍경이 선명하다. 대중교통이 없다시피 해 출퇴근 시간이면 왕복 6차로 도로가 오토바이 물결을 이룬다. 부딪히지 않고 움직이는 이들의 거대한 이동에 물살 빠른 강을 떠올리기도 했다. ‘세 발짝만 가도 시동을 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애용한다. ‘길에 걸어 다니는 것은 개와 외국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렇다 보니 인도는 오토바이 주차장이나 오토바이 전용 도로가 되기 일쑤다. 멀쩡한 두 다리를 갖고서도 걸을 수가 없어, 도보로 5분이면 닿을 거리를 차로 10분을 가기도 했다. 미흡한 대중교통 체계와 걷지 않으려는 국민성이 뒤엉킨 혼잡한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올해 초 서울로 복귀한 뒤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잘 꾸려진 대중교통 수단을 두고, 시간이 허락하는 경우,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이동했다. 퇴근 때는 일부러 한두 정거장 전에 내려 귀가하기도 했다. 가고 싶은 곳에, 내 두 다리로 지면을 밟으며,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서울 재발견’ 수준의 감흥이었다.

그 즐거움은 오래 못 갔다. ‘언택트’가 화두가 되면서 버스보다는 전동 킥보드 같은 1인 교통수단 이용자가 급증했고, 식당을 직접 찾기보다 집에 앉아 손끝에서 이뤄지는 주문에 오토바이들이 인도 위를 구르기 시작한 탓이다. ‘원동기 자전거’로 분류되는 전동 킥보드는 차도로 다녀야 한다. 그러나 차도를 달리는 킥보드는 보지 못했다. 정지선에 서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는 오토바이도 올들어 보지 못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두 발로 걷는 즐거움까지 앗아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에 더해 킥보드 운행 가능 나이 제한을 16세에서 13세로 낮춘 도로교통법이 내달 10일 시행되면 인도는 더욱 걷기 위험한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미간에 힘 잔뜩 넣을 일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서울시에서 낸 보도자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행주권 강화 계획인데, ‘어떤 경우에도 보행자를 최우선한다’는 내용으로 압축된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보행환경 개선에 나선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있던 터, 그리고 그것이 주로 보행 약자를 위한 것인데 반해 서울시의 정책은 보편적 보행자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중에서도 오토바이 번호판의 전면 부착을 위한 관련법 개정 계획이 돋보인다. 관련 법안이 이미 발의돼 있지만, 배달 업계의 반발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업계는 ‘공기 저항에 따른 운전 방해’, ‘핸들 조작 곤란’ 등을 들먹이고 있다. 더 빨리 배달하고 더 많은 주문을 처리하기 위한 라이더, 그리고 주문한 음식을 빨리 받고 싶어 하는 고객의 이해가 교묘하게 결탁하면서 이런 핑계가 나왔다.

1990년대 들어 보행권 강화를 위한 정책적 움직임의 결과로 덕수궁 돌담길이 편하게 걷을 수 있는 길이 됐고, 광화문 사거리에도 횡단보도가 설치됐다. 보행자들은 편해졌고 택시 운전자들이 우려했던 교통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행자의 날인 11월 11일에도 횡단보도가 놓이고 보도블록을 보다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은 전국 곳곳에서 이뤄졌다. 어느 정도 보행 인프라가 갖춰졌는데도 보행권이 악화한다면 관련 규제 수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팍팍한 삶의 라이더들, 외출이 두려운 방콕족들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안전하게 걷고 싶을 뿐이다.

정민승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