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 보지 않은 삶이 부러운 적이 있다. 헛디디거나 미끄러져 주저앉아 있는 시간, 다시 일어서려고 들이는 에너지가 아까웠다. 빠르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순탄하게 자박자박 걸어가는 게 가장 보통의 인생이라 여겼다. 나 또한 그 보통의 범주에 들기를 바라면서.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전 쇼트트랙ㆍ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박승희(28)가 요즘도 가끔 떠올리는 생각이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500m 결승. 우리나라의 취약 종목이라는 이 경기에서 박승희는 예선을 1위로 통과해 금메달의 기대를 높였다. 자신도 그랬다.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딘 몸 상태는 최상, 레인도 가장 유리한 1번이었다. 심지어 단거리에 강한 경쟁자들이 예선에서 탈락했다. 모든 상황과 조건이 골드 빛이었다.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선두로 치고 나간 건 박승희. 그러나 채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2, 3위 선수들이 한데 미끄러지며 코너링하던 그까지 밀어 넘어뜨렸다. 곧장 일어났지만, 이번엔 스케이트 날이 바닥에 걸리며 또 고꾸라졌다. “처음 넘어졌을 때 그 짧은 시간에도 ‘누군가 실격할 테니 2등은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일어났거든요. 근데 날이 앞쪽으로 빙판에 꽂히면서 또 넘어진 거예요. 마음이 급하면 그렇죠.”
그래도 그는 일어나 달렸다. 결과는 동메달. 1998년 전이경 이후 이 종목 메달은 그가 처음이었다.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못내 아쉬웠다. “500m에서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쇼트트랙 종목에 큰 회의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컨디션이 좋고, 잘 달려도 다른 사람이나 주변 상황에서 비롯된 변수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구나 싶었죠.” 4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선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계기다.
은퇴 이후 그토록 오래 꿈꾼 디자이너의 관문 앞에서 그는 또 한번 주저 앉았다. 17년 선수 생활 동안에도 없었던 슬럼프였다. 국가대표가 아닌, 자연인 박승희로서 자신감을 상실한 거다. ‘또래의 다른 이들에 비해 나는 이룬 게 뭔가. 이제야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무엇하나.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불안감이 자신을 옥죄었다.
금메달을 눈앞에 두고도 넘어졌다 일어나 봤는데, 인생에선 불가능할 리 있을까. 불현듯 찾아온 삶의 위기를 이겨낼 힘은, 과거 빙판에 섰던 자신에게 있었다.
쇼트트랙 전 종목에서 메달을 딴 ‘올라운더 메달리스트’에서, 패션 디렉터이자 가방 브랜드 ‘멜로페(MELOPE)’의 CEO로, 자신만의 삶의 멜로디를 엮어 가고 있는 박승희 대표를 10일 만났다. 선수 시절보다 마른 몸에, 화장기 어린 얼굴은 여전히 앳됐다.
-선수 때와는 일과가 많이 바뀌었죠.
“맞아요. 가장 큰 차이는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쇼트트랙 할 때는 주말 하루 정도 빼고는 매일 새벽 4시50분에 일어나서 훈련을 시작했거든요. 오후 9시 30분까지 야간 훈련하고 일찍 잠드는 스케줄이 몸에 배었었죠.”
-스케이트를 신은 게 총 몇 년인가요?
“아홉 살에 처음 취미로 시작했다가 열한 살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선수로는 그러니까 17년이죠.”
-어머니가 피겨 만화 ‘사랑의 아랑훼스’를 읽고 언니 박승주, 남동생 박세영 선수까지 모두 스케이트를 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한데요.
“맞아요. 학창시절에 그 만화책을 엄청 재미있게 보셨대요. 초등학교(수원 소화초) 특기ㆍ적성 과목에 ‘빙상’이 있어서 어머니는 그게 피겨인 줄 알고 넣으신 거예요. 2학년 때였는데 토요일마다 언니랑 과천 빙상장에 가서 스케이트 신고 노니까 마냥 즐거웠죠.”
-그러다 어떻게 선수가 된 거예요?
“제가 습득력이 좋았나 봐요. 어느 날 빙상반 선생님이 부모님께 선수 시키실 생각 없으시냐고 한 거죠. 엄마도 그때 비로소 빙상 경기에 어떤 종목들이 있고 국가대표도 될 수 있다는 것들을 알게 됐어요. 선수반에 들어가면 이런 운명을 살게 되리라는 건 저도, 엄마도 몰랐지만요. 하하.”
-엄마가 선수반 들어가보겠느냐고 물었을 텐데요.
“네, 근데 어릴 때라 이렇게 재미있는 스케이트를 매일 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좋았죠. 그렇게 힘들 줄도, 매년 그만두고 싶을 줄도 몰랐어요.”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럼요. 선수반에 들어가서 경기를 준비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매일매일 엄마한테 그만두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머리를 잘 쓰셨죠. 시즌이 끝난 봄에는 훈련 강도가 좀 약하거든요. 그때 엄마가 ‘그럼 시즌 들어갈 때까지만 해보고 다시 생각해봐’ 하신 거죠. 비시즌 때는 저도 좀 할 만 하니까 그러겠다고 하고요. 그게 이어졌죠. 하하.”
-언제까지 그랬어요?
“목표가 생기면서부터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죠.”
-계기가 있나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2002) 쇼트트랙 경기 중계를 봤어요. ‘내가 하는 거랑 똑 같은 종목으로 올림픽이 있구나, 올림픽은 엄청 큰 대회구나, TV에서 중계도 해주는구나’ 안 거예요. 우리나라 선수들도 출전하고요. 그때 머릿속으로 문득 그런 계산을 해봤어요. ‘올림픽이 4년마다 열리면, 2010년에는 나도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겠구나. 그럼 2010년에 나도 올림픽에 출전해야겠다.’ 그 전에는 혼나지 않기 위해서 급급했고 그만두고 싶다는 말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때부턴 달라졌죠.”
-고작 열한 살인데,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제가 돌이켜 봐도 되게 어린 나이에 목표가 확실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표를 세우니 뭐가 달라지던가요.
“2010년 올림픽을 목표로 하니까 그때까지 8년 정도 남은 거잖아요. 그 기간 동안 수없이 경기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 작은 경기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것은 모두 올림픽에 도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올림픽이라는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라고 본 거군요.
“네, 맞아요. 주니어 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 이런 단계들을 꼽고 그걸 이루기 위한 가장 가까운 단계를 생각하고 운동하는 거죠.”
-2007년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 1,500m 종목에서 동메달을 땄죠.
“아마 처음 태극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었을 거예요. 시상대에서 진짜 이걸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죠.”
2007년부터 계속 국가대표로 선발된 그는, 선수로 세운 첫 목표점인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드디어 출전하게 된다. 1,000m와 1,500m에서 3위에 올라 동메달을 땄다.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기분은 어땠나요.
“엄청 아쉬웠어요. 약간 허무하기도 했고요. 다음 목표를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죠. 허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요. 그래서 1년간 국대 선발전 준비를 쉬었죠.”
-다음 목표는 4년 뒤의 소치 올림픽이었겠네요.
“네, 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은퇴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빠를수록 좋겠다 싶어서 2010년 밴쿠버를 목표로 한 거였고요. 그게 4년 미뤄진 거죠. 소치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훈련했어요.”
-훈련 강도가 어느 정도였나요.
“당시 여자 대표팀 분위기가 그랬어요. 2010년 밴쿠버 때 3,000m 계주에서 억울하게 실격 처리됐잖아요. 소치에선 만회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죠. 보통 계주는 연습 때 5,000m를 타는데 그때는 1만m라고 가정하고 훈련했죠.”
드디어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500m 결선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가 예선을 1위로 통과해서다. 메달이 도통 나오지 않는 이 취약 종목에서 그가 금메달을 따리라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그는 두 번이나 넘어지고 만다. 처음은 다른 선수들이 넘어지면서 건드려서, 두 번째는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걸려서다.
-두 번째 넘어지고 나서 어땠나요.
“마음이 급해지면 날이 앞쪽으로 꽂히게 되거든요. 그랬던 거죠. 그런데 그 전에 좀 불안하긴 했어요. 결승까지 예상보다 너무 순탄했거든요. 처음 넘어졌을 땐 내 잘못이 아니니 누군가 실격 처리 되겠다 그럼 2위는 하겠다 싶어 일어났는데, 두 번째 넘어졌을 땐 3등이겠구나 했죠.”
-동메달이 확정되고 나서야 눈물을 쏟았죠.
“너무 아쉬워서 울었어요. 5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꿈이었거든요. 단거리에 강하기도 했고, (한국의) 취약 종목에서 해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죠.”
500m 결승전에서 부상까지 당해 그는 이틀 뒤부터 예선이 시작되는 1,500m는 출전을 포기했다. 며칠간 치료에만 집중했고 후반에 열린 1,000m전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팀워크와 훈련량이 압도적이었던 여자 국가대표팀은 3,000m 계주에서 1위에 올라 설욕했다.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간 고생했던 것들, 힘든 훈련이 생각이 났어요. 여기까지 오기 위한 여정들이요. 아마 다른 선수들도 다 그럴 거예요. 기쁘기도 했고요. 복합적인 감정이죠. 그런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쉬어야겠다, 이제 쉴 수 있겠다’였어요.”
얼마나 훈련이 고됐으면, ‘이제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가장 처음 밀려왔을까.
-경기 직전에 하는 생각이 있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생각을 안 하죠. 아니, 생각이 잘 안 나요. 엄청 집중을 하거든요. 가끔 경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쇼트트랙은 정말 찰나거든요.”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그럼 은퇴할 생각은 안 했나요?
“실제 6개월 정도 쉬었어요. 선수가 그 정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평창 동계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니까 출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동생(박세영)은 아직 선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나가보자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쇼트트랙으로는 싫더라고요.”
-왜요?
“소치 때 500m 결승전을 계기로 회의감이 많이 들었거든요.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해도 한순간 타인의 실수로 나까지 영향을 받으니까요. 한국이 쇼트트랙이 강하다 보니, 우리나라 선수끼리의 경쟁도 좀 힘들었고요.”
그는 그래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꿨다. 이미 6개월을 쉰 뒤였다. 처음엔 국대 선발전에도 나가지 말고 그저 1년 정도 스피드스케이팅을 한번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코치의 눈엔 가능성이 보였나 보다. 3개월 뒤에 있는 국대 선발전에 나가보라고 그를 설득한 거다. 그는 망설였다. 연습 기간이 너무 짧아 자신이 없었다. “잘 타도, 못 타도 아쉬울 게 없으니 부담 가질 필요 없지 않느냐”는 부모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국대로 선발이 됐고, 다시 한 달 뒤엔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2차 대회 1,000m 경기에서 10위에 올랐다.
-전향하자마자 세계에서 10위를 한 건데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인가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쑥스럽게 웃으며)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니까, 된 거예요.”
-주위 반응은요?
“쇼트트랙으로 다시 오라는 권유가 정말 많았죠. 또 제가 대표팀에서 맏언니 역할을 할 시기이기도 했고요. 특히 계주에서는 이끄는 선수가 한 명쯤 있어야 단합이 잘 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결심을 바꾸지 않으니 주위에서 의아해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도 사람이니까 ‘이렇게 아쉬워할 바엔 전향하지 말걸’ 하는 생각도 물론 들어요. 엄마도 나중에 ‘그때 전향하지 않았으면 고생을 덜하지 않았겠냐’고 했죠. 제가 ‘왜 그때 안 말렸냐’고 하니까 ‘말을 했었는데 너한텐 아예 안 들리는 것 같더라’라고 하시더라고요. 두 선택에는 다른 배움이 있었다고 믿어요.”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이군요.
“당시 내 선택이니까 받아들이려고 해요. ‘전향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궁금함은 있지만.”
2018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1,000m 출전을 끝으로 그는 17년 선수 생활을 마무리 했다.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주니어 포함), 아시안게임에서 그가 딴 금메달만 13개. ‘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 메달 획득’ ‘동계올림픽 공동 최다 메달리스트’란 수식어도 얻었다. 평창 도전으로 ‘대한민국 빙상 사상 최초로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두 종목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라는 기록도 추가했다.
-평창을 끝으로 정말 은퇴의 시간이 다가온 거네요.
“네, 확고했죠. 미련 없이 할 건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퇴 이후에 어땠나요.
“선수로 뛸 때는 압박감을 느낀 적이 없었거든요. 감기 한번 안 걸렸고요. 그런데 저도 모르는 새 몸이 긴장하고 있었나 봐요. 은퇴하고 나서 진짜 많이 아팠어요. 감기에다 부비동염까지. 결국 수술도 했죠.”
-정신이 몸을 만드나 봐요.
“그래서 신기했어요. 내가 그동안 엄청 힘들게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요.”
-인생의 이른 시기에 많은 걸 이뤘어요. 그래서 은퇴 이후의 삶을 시작할 때도 남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운동하느라고 어린 시절이 생각 안 날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어요. 인생의 한 챕터가 넘어간 느낌이죠. 이제야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통상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이 은퇴 후에 지도자의 길을 걷곤 하는데, 전혀 다른 분야를 도전했어요. 패션에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요. 언니 티셔츠로 가방을 만들었다가 혼난 적도 있죠. 하하. 이모가 한때 연기를 했는데, 저도 배우를 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은퇴 시기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그 꿈은 접고 원래 좋아했던 패션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죠.”
-좋아하는 게 따로 있었는데 어떻게 17년이나 운동을 했어요?
“어쩌다 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됐고 또 재미도 있었으니까요. 이왕 시작한 거 단계를 밟아서 목표를 이루고 내가 원래 하고 싶던 일에 도전하자고 마음먹었죠.”
-패션학교에도 다녔다고 들었어요.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그해 여름에 에스모드서울에 등록해서 다녔어요. 프랑스의 에스모드파리가 본교인 패션 디자인 학교예요. 장학생 선발에 지원했는데 뽑혀서 다니게 됐죠.”
-어땠나요.
“엄~청 재미있었어요! 원서를 넣은 이유도 확인해보고 싶어서였거든요. 디자인을 계속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지.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 배웠죠. 아침에 가방 메고 지하철 타고 학교에 가는 일상도 그렇게 좋더라고요.”
-디자인을 배운 건 처음이었나요?
“운동선수할 때 중간에 한번 배운 적이 있어요. 소치 동계올림픽 후에 주말을 이용해서요. 그런데 운동과 병행하기는 어려워서 그만뒀죠.”
-그럼 확신이 들었겠네요.
“네, 해도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내 브랜드를 만들어 볼 준비를 시작했는데 그때 번아웃(탈진, 무기력증)이 왔어요. 살면서 처음이었죠.”
-왜 그랬을까요.
“준비를 하면서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거든요. 그런데 자신 있게 하라고 권하거나 추천하는 분이 거의 없었어요. 반대하거나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고요. 업계의 부정적인 얘기도 많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자신감은 없어지고 두려움은 커졌죠. 부모님이 걱정하실 정도로 어두워졌어요. ‘나는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더라고요. 사람도 잘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죠.”
-만으로 고작 스물 여섯이었는데요.
“맞아요. 지나치게 많은 걱정을 했죠. 그런데 그때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어요. 남부의 브라이튼이라는 해안 도시에 머물렀죠. 처음 며칠은 매일 울었어요. 공기는 낯설고, 혼자였고요. 어학연수나 유학으로 간 게 아니라서 할 일도 없었죠. 그러다가 소개 받은 영국인 친구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재미있어졌죠. 아마 건강만 괜찮았다면 영국에 더 오래 있었을 것 같아요.”
-거기서도 스트레스가 여전했군요.
“그런가 봐요. 그런데 영국에서도 디자인은 했어요. 처음 몇 달은 전혀 손대지 않았는데 나중에 문득 가방 디자인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스케치를 했어요. 창의적인 디자인이 많이 나왔죠.”
-영국에서 돌아와선 그럼 좀 나아졌나요.
“별반 다르지 않았죠.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언니 권유로 제주도에서 열리는 ‘낯선 컨퍼런스’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게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이름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지인의 추천으로 모인 40명의 낯선 사람들이 2박 3일간 함께 참여하는 독특한 형식의 프로젝트였다. 각자 대화하고 싶은 주제를 써내 그 중 일부를 추려 일 대 일 혹은 그룹으로 얘기를 이어나가는 게 주요 프로그램이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를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거쳐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는 후기가 눈에 띄었다.
-거기서 어떤 경험을 했죠?
“평소에는 낯선 사람과 뜬금없이 대화를 할 기회가 없잖아요. 신기했죠. 30대부터 40대까지 제게는 언니, 오빠뻘인 참가자가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어떤 언니와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아요. 직업을 굉장히 여러 번 바꾼 분이었죠. 공연계에 있다가 카페를 열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하고. 그런데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제가 질문을 엄청 많이 하더라고요. ‘이 일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이런 경우엔 어떻게 했어요’ 같은. 그런데 그 언니가 ‘그냥 하고 싶어서 했어.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하는 거예요. 그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왜요?
“예전에 내가 했을 법한 대답이었거든요. ‘왜 내가 나를 잊고 살았을까. 예전의 나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텐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망설이고 불안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일을 계기로 예전으로 돌아왔죠.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의 얘기와 조언, 응원으로 치유도 많이 받았고요. ‘낯컨’에 다녀오고 바로 브랜드 준비를 시작했죠.”
그는 영국에서 디자인 구상을 시작한 가방으로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발로 뛰어 가방 샘플을 만들어줄 샘플실과 생산 공장을 뚫었다. 홈페이지도 혼자 두 달을 매달려 완성했다. 친언니(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박승주)는 서무를 맡았다. 직원 없이 자매가 꾸려 가고 있다. 9월 11일 론칭한 브랜드 이름은 ‘멜로페(MELOPE)’.
-왜 멜로페라고 지었나요.
“음악 선율이란 뜻이에요. 브랜딩을 도와준 전문가와 아이디어를 나누다 정했죠. 사람마다 삶의 멜로디가 다르잖아요. 자기만의 멜로디를 자유롭고 당당하게 누리며 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는데 힘들진 않나요.
“너~무 신기해요. 내가 디자인한 가방을 다른 사람이 좋아해 주고 그걸 구매해서 하고 다닌다 건, 참 가슴 벅찬 일이더라고요. 이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죠.”
-어떤 마음으로 가방을 만드나요.
“내가 들고 싶은 가방이 첫째고요. 둘째는 이 가방을 메고 가는 장소가 무척 다양할 텐데 그 시간이나 공간과 잘 어울렸으면 해요. 행복한 시간의 일부였으면 하죠.”
-나에게 가방이란 뭔가요.
“음, 멜로페를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서 길게 가는 브랜드로 만들고 싶거든요. 그렇게 보면, 가방은 앞으로 해나갈 모든 경험의 밑바탕이 되지 않을까요.”
-스케이트는 어떤 의미인가요.
“첫걸음 같은 것 아닐까요. 운동을 하면서 배운 게 너무나도 많고, 또 운동으로 어느 위치까지도 가 봤고요. 앞으로 나이가 더 들면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걸 이겨낼 힘은 스케이트를 탔던 시간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어릴 때부터 잊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이 있어요. 엄마가 해준 말씀 중 하나죠. ‘가슴 뛰는 일을 해라.’ 저는 뭘 선택하든 제 행복이 우선이에요. 패션 디자인도 내가 무언가를 구상해서 만들어내는 일이 굉장히 설레니까 선택한 거죠. 운동선수가 은퇴한다고 하면 주위의 열에 아홉은 ‘이제 코치하겠네’ 하거든요. 빙상이 아니어도 충분히 다른 분야에서도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그에게 ‘금메달리스트’ ‘올라운더 메달리스트’ ‘국가대표’라는 수식어 말고 달리 불리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곰곰 생각하더니 그는 “그냥 박승희”라고 답했다. “나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고 살고 싶어서”라고 했다. 빙상을 벗어나 틀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이 나는 삶을 꿈꾸고 있음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살면서 누가 밀쳐서, 때론 내 실수로 또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그다지 두렵진 않을 것 같았다. 주저앉아 봤고, 일어나 봤으니까. 그렇게 나만의 가락이 있는 삶은, 단단해서 아름다울 테니 무에 그리 아쉽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