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집 기사 부르기 꺼려질 때…언니들은 이제 드릴을 든다

입력
2020.11.12 04:30
16면
'여자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해본 적'이 없었을 뿐
'여기공협동조합'의 '집 고치는 여성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어쩔 수 없이 ‘낯선 남자’를 들여야 하는 순간은 갑자기 닥친다. 낡아 터진 배관이 말썽을 부릴 때나, 수명이 다한 전등을 갈아야 할 때, 어김없이 ‘남(男)의 손’이 필요하다. 막상 수리기사가 하는 걸 보면 별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냐’ 물으면 ‘말해 주면 알긴 아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그래서 여성들이 직접 드릴과 망치를 들기 시작했다. 여성과 기술을 연결하는 장협 '여기공협동조합’이 마련한 강좌 ‘집 고치는 여성들’에선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여성이다. 찾아오는 여성들은 나이를 불문한다.

‘자립’을 꿈꾸는 20대 중반의 기자가 이들 틈에 섞여 생전 처음 드릴을 잡아 봤다. 지난달 말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서 열린 ‘공구 기초 과정’에서다. 스무 명 남짓의 수강생 중 대다수가 기자처럼 드릴을 처음 만져 보는 이들이었지만, 수업 내내 즐거운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이 재미있는 걸, 이제서야 처음 해 봤다니! 어쩐지 억울한데요?”



드릴과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는 사실, 아셨나요?

“여러분, 드릴이라고 다 같은 드릴일 것 같지요? 아닙니다. 나한테 맞는 짝은 다 따로 있어요. 일본제 ‘마키타’의 경우, 그립감은 일품이지만 힘이 좀 떨어져요. 가장 대중적인 독일제 ‘보쉬’는 힘도 섬세함도 무난하지요. 가격이 센 편인 미국제 ‘밀워키’는 힘 역시 세요. 아! 요즘 작업자들 사이에서 ‘힙스터 아이템’이라고 불리는 ‘디월트’예요. 어때요? 디자인이 확실히 훌륭하죠?”

네 명씩 한 조를 이뤄 앉은 테이블 위엔 저마다 다른 크기와 디자인, 개성을 자랑하는 드릴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강사 ‘인다(이현숙)'씨가 그중 하나인 ‘보쉬’를 들고 버튼을 누르자, 규칙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기계음이 강의실을 잔잔하게 채웠다. 다음은 힘이 좋다는 ‘밀워키’, 좀 전보다 무겁고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씩 만져 보니 정말 느낌이 다 달랐다. 어떤 것은 섬세한 만년필 같고, 또 어떤 것은 굵직하게 그려지는 매직 같았다. “드릴과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거든요.” 과연 그랬다. 손이 작고 악력이 약한 기자에겐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작은 크기의 ‘마키타’가 잘 맞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 보니 적당히 무게감이 있는 ‘디월트’가 적격이었다.


본격적인 실습은 ‘내 손에 딱 맞는 작업용 장갑’을 착용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소형 사이즈부터 대형 사이즈까지, 다양한 크기의 장갑이 준비돼 있었다. “장갑이 크거나 헐거우면 회전하는 드릴에 말려 들어가기 십상이거든요.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마음 수련’하듯 천천히… 드릴 수업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실습은 언제나 ‘2인 1조’로 이뤄진다. 한 명이 전동 드릴을 들면, 다른 한 명이 나사못이 들어가는 나무판을 단단히 잡는다. 두 사람이 교대로 드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실습한다. 진도를 빼는 선생님도, 따라가는 수강생들도 느긋하다. 성미가 급한 기자가 초조한 표정을 짓자 강사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회전력이 강한 도구를 사용할 땐 특히 조심해야 하거든요. 까딱 잘못했다간 목재가 함께 돌아가며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꼭 다른 한 명이 나무판을 잡아 주고, 나사못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지켜봐 줘야 합니다.” 사려 깊은 당부에 답답했던 마음이 일순간 쑥 내려간다.

막상 드릴을 잡고 나사산에 비트를 물리자 덜컥 겁이 났다. “선생님, 비뚤게 들어가면 어떻게 하죠?” “잘못 박아도, 빼낼 수 있나요?”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수도승의 선문답처럼 평화로웠다. “천천히 합니다. 버튼을 쥔 손에서 힘을 빼세요. 이렇게 천천히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잔뜩 긴장했던 손가락에서 힘을 빼니 ‘왜애애애애앵’ 하던 설익은 소리가 ‘위이이이잉’ 안정적인 톤으로 바뀌어 갔다.

절간에 앉아 마음 수련하듯 느긋하게 나사못을 돌리다 보면, 어느새 단정하게 제자리를 찾아가 있다. “드릴 수업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니, 미처 생각지 못하셨죠?” 뜨끔했다. 혹시 몰라 귀마개까지 준비해 온 터였다. “드릴을 빨리 쓰는 사람은 흔해도 느리게 쓸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아요. 처음에 이렇게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습관을 들이기 어렵답니다.” 직접 써 보니, 세게 눌러 회전 속도를 올린다 해서 ‘더 강하게’ 박히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해본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집 고치는 여성들’ 강좌는 공구 기초와 전등 달기, 실리콘 마감, 타일 깔기 등 집 고치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실무 지식을 총 10회 차에 걸쳐 두루두루 가르친다. 강사들부터가 용접부터 배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을 연마한 전문가들이다. 이날 수업을 진행한 여기공 대표 ‘인다’(강사와 수강생들은 서로를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부르며 사생활을 존중한다) 이현숙씨는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아주 잘하고 계세요’를 입버릇처럼 반복했다.

자신이 없었던 기자도 수업이 끝나 갈 즈음엔 꽤 능숙하게 드릴을 다룰 수 있었다.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해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경험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구를 다루는 일은 힘만 좋다고 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도구의 원리를 정확히 알고,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지 않는 선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지요.”

아버지나 오빠의 전유물이었던 공구들을 마음껏 주무르며, 여성들은 해방감을 느낀다. 수강생 라임은 “힘이 모자라서 공구를 쓸 수 없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됐다”며 “앞으로는 혼자 사는 친구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여기서 배운 것들을 공유하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수강생 루시는 “주먹구구식으로 쓸 때는 몰랐던 원칙과 기본을 차근차근 배워 보니 자신감이 샘솟는다”며 앞으로의 수업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인다는 한 수강생의 사례를 들려줬다. “소감 나누기를 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후기는 ‘비로소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게 됐다’는 이야기였어요. 가까이 있는 남성에게 어쩔 수 없이 의지하던 상황에서 벗어나면서, 스스로를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됐다고요.”

최근에는 ‘비혼’을 결심하고 일찌감치 혼자 살 집을 마련한 여성들의 발걸음이 부쩍 늘고 있다. 내 한 몸 뉠 집 한 채는 ‘스스로’ 건사해 보겠다는 단단한 다짐들이 모인 결과다. 이 수업이 나아갈 종착지도 다르지 않다.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자립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저희 수업의 궁극적 목적이랍니다.”



박지윤 기자
전윤재 인턴기자
서현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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