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당신이 누구이든 또 어디에 있든 / 이 세상은 당신의 상상에 자신을 내맡긴다 / 흥분하여 목이 쉰 야생 거위처럼 당신을 부른다 / 사물의 가족 속에 들어 있는 당신의 자리를 / 거듭 거듭 소리쳐 알려준다.” 미국의 시인 매리 올리버의 시 ‘야생 거위’의 마지막 구절이다.
내가 이 시를 만나게 된 것은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가 1997년에 내놓은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였다. 이 시는 2009년 지구적으로 관심을 모았다. 이해 9월 11일 미국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9ㆍ11테러 추모식에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이 시를 읽었다. 9ㆍ11테러 희생자 가족들과 미국인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획에서 파머를 다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파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유를 선사한다. ‘가르침’,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 그의 주요 저작들은 치유와 용기와 희망에 대한 정직하면서도 기품 있는 기록들이다.
여기서 내가 특히 살펴보려는 것은 파머가 2011년 내놓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다. 원제목은 ‘민주주의의 마음 치유하기(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다.
파머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은 감정을 넘어선 자아의 핵심이다. 그것은 지적, 정서적, 감각적, 직관적, 상상적, 경험적, 관계적, 신체적 앎의 방식이 수렴되는 중심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 통합되는, 지식이 더욱 인간적으로 충실해질 수 있는 장소가 곧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이 마음은 부서져 있다. 파머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로 정치에 있다. 정치란 본디 권력 추구 이전에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오래되고 고귀한 노력이다. 문제는 오늘날 정치가 자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며, 절박한 요구를 무시한 채 편리한 결정만 내림으로써 우리 마음을 깨어진 상태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파머에게 우리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의 정치다.
이러한 현실에 맞서 파머는 새로운 ‘마음의 정치’를 소망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은 선과 악의 모든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내적인 힘의 근원이다. 이 힘은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분출되고 증폭된다. ‘마음의 민주적 습관’이 주어지면, 마음은 부서져 흐트러지는 대신 세상에 대해 열리는 탄력성을 갖게 된다.
마음의 민주적 습관으로 파머가 주목하는 것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고전적인 견해다. 토크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법과 제도보다 습관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의 습관이란 인간의 다양한 관념과 의견, 생각의 습관을 형성하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것들의 전체를 말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에는 두 가지 마음의 습관이 존재했다. 독립적인 개인주의와 상호의존적인 공동체주의가 그것이었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창조적 긴장을 이루는 것이 마음의 민주적 습관이었다. 이 마음의 민주적 습관이 곧 마음의 정치다.
파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우리에게 비통을 안겨주는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회복함으로써 정치가 공공선을 위한 활동이라는 본래의 자기 목적을 구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파머는 네 단계를 제시한다. 공동체로부터 더는 분리된 채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내면화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생각을 나누고, 그 결과 제도를 바꾸며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파머의 논의를 내가 주목하는 까닭은 우리 인류의 선 자리와 갈 길에 있다. 불확실성이라는 뉴 노멀이 지구적 경향으로 자리 잡은 현재, 인류가 그 불확실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다면, 그것이 제도로부터 주어진 상처든 자아로부터 비롯된 상처든,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파머는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등 많은 사회사상가들은 마음의 불안과 분노를 이야기한다. 그 무엇인가에 쫓기고 피로하며 화가 나 있는 ‘성난 사회(angry society)’는 오늘날 지구적 경향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 마음은 파편화되며 훼손되고 찢겨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파머가 지적하듯, 내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소비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또 희생양을 만들어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지만, 그것이 파시즘이란 정치적 질병을 키우기도 한다.
이렇게 상처 난 마음은 마음의 민주적 습관을 배양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이러한 파머의 논리는 물론 사회적 구조나 제도보다 개인적 의식과 문화를 중시하는 경향에 기울어져 있다. 다시 말해, 파머의 주장은 마음이 제도로부터 받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치유를 받기 어려운 사회ㆍ경제적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마음의 정치 담론이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파머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되는 까닭은 마음이 갖는 중요성에 있다. 마음이 바뀌어야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어야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진 않지만, 마음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고선 새로운 삶과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파머가 통찰하듯, 마음의 연금술은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의 연대로, 개인 간 긴장을 공공선을 향한 출구로, 사회적 갈등을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
2020년대에 파머의 논리가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파머가 말하는 정치란 넓은 의미에서 우리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오늘날 이러한 정치는 훼손된 상태로 놓여 있다. 삶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포괄적인 정치의 의미를 회복하는 길은 민주주의의 마음, 곧 마음의 정치를 튼튼하고 활기차게 뿌리내리게 하는 데 있다.
개인적 차원이든 공동체적 차원이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의가 존재의 목표라면, 그 목표의 구현은 바로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파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마지막에 인용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설파한 언명은 불확실성의 망망대해라는 2020년대를 항해하는 우리 인류에게 북극성과도 같은 빛을 선사하고 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거나 아름답거나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역사의 즉각적인 문맥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혼자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파머의 사상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높은 편이다. 그의 저작들 대부분이 우리말로 옮겨져 있고, 교육과 영성에 대한 그의 사상을 다룬 연구들도 있다. 그가 제시한 마음의 문제는 서구 사상보다 외려 동양 사상에 가까이 다가서 있기도 하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정치학적 텍스트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2020년대 우리 사회에서 삶의 무의미함과 불안과 분노가 개인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면, 파머의 통찰은 이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천적 윤리학으로서의 의미를 선사한다.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파머의 제언이 2020년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질문하기’와 ‘해답 구하기’다. 먼저,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것인가, 포괄적 의미의 정치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어, 우리는 해답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그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개인적 자율과 공동체적 연대를 공존시킬 수 있는 포괄적 의미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응답들이 그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튼튼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2020년대에도 여전히 중대한 일대사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