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일 그만둬라."
종로의 한 귀금속 세공업체에서 실톱으로 반지 사이즈 수리 작업을 하다 사고로 손에 톱날이 박힌 다음날. 박정훈(가명·35)씨가 의사 소견대로 일을 한 달 쉬겠다고 하자 사장은 대뜸 해고를 통보했다. 지난 2년간 연장근로수당 한 푼 못 받고 밤 9, 10시까지 일했던 회사였다. "배신감이 들었죠. 그 전에 너무 힘들어서 제가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달래고 붙잡아서 남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제가 일을 못하게 되니까 바로 나오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부당해고지만 딱히 구제받을 방법은 없었다. 박씨가 일하던 공장은 사장 포함 직원 4명이 전부인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이어서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4대보험 미가입 상태라, 산재 처리도 받지 못했다. "사장이 나오지 마라 하면 다들 순순히 안 나오는" 법을 학습했던 그 역시 조용히 그만뒀다. 박씨는 지금 인근의 또 다른 귀금속 세공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열아홉 고교 현장실습생으로 세공을 시작한 후 17년째. 단 하루도 법정 근로시간, 수당, 휴가가 보장 된 곳에서 일해본 적 없다는 그는 "사장들이 법을 제대로 지켰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 회사에 오래 일한 사람만큼 물건을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사장도 일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일하니까 벌어가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기계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죽음으로 맞선 전태일의 외침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유효하다. 박씨가 일했던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은 전태일이 숨을 거둔 1970년 11월 13일처럼 여전히 근로기준법 바깥에 놓여 있다. 이유 없이 사람을 잘라도, 밤 새서 일을 시켜도, 장시간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괜찮은 합법적인 일터가 아직 존재한다. 전체 근로자 4명 중 1명(26.5%)인 5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 587만여명(통계청, 2018년 기준)은 오늘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 2020년 11월의 '평화시장'으로 출근한다.
5인 미만 사업장이라고 근로기준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이라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조건을 명시(근로계약서 작성)해야 하고 휴게시간, 주휴일, 출산휴가 등을 보장해야' 한다. 문제는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제외되는 △근로시간 △가산수당(연장·휴일·야간수당)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 조항이 모두 법의 '핵심'이라는데 있다.
정진우 권리찾기유니온 집행위원장은 "핵심 조항은 그 개별 조항뿐 아니라 다른 여러 근로 기준에 영향을 준다"며 "이를테면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못하게 되면, 해고만 불이익을 당하는 게 아니라 평상시에 직장갑질이나 최저임금 위반 같은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해고를 우려해) 사업주에게 항의하고 공개적으로 다투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지난 2일 귀금속 매장과 영세 귀금속 제조·수리업체가 밀집한 서울 종로 3가 거리에서 만난 김정봉 민주노총 종로주얼리분회장도 "해고가 자유로운 작은 사업장 노동자는 사장이 퇴직금을 안 받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해도, 일이 줄었다고 갑자기 임금을 30~50% 깎아도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이런 조건에서 노동 존중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사장님' 말이 곧 근로기준법이 되는 현실. 이는 '관습'이라는 유령의 형체로 살아남아 근로자들을 끊임없이 열악한 근로 환경 속으로 떠민다. 5인 미만 사업장 대다수가 휴게시간과 같은 근로기준법 적용 조항은 물론이고 4대보험 가입, 퇴직금 지급과 같은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조차 지키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9월 근로감독을 실시한 상습 임금체불(임금·퇴직금 등) 사업장의 41.8%는 바로 이들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이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작은 사업장의 경우 규범에 예외를 뒀더니 규범에서 아예 배제돼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에 예외를 두면서 일부 사업주가 이를 악용하는 폐해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게 일명 '법인 쪼개기'다. 김지영(가명·33)씨도 과거 가짜 5인 미만 출판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김씨는 "직원이 분명 10명이 넘는데도 출근 첫 날부터 우리는 5인 미만이라 연차도 없고 추가 근로수당도 일절 없다고 당당히 말하더라"며 "메일 하나 쓰더라도 업무에 따라 A법인명, B법인명을 구분하게 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박종식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사업장이 5인 미만을 유지하기 위해서 직원이 많아도 4명까지만 4대보험에 가입시키거나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체결하는 식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통계상 5인 미만 사업장은 전체의 79.8%에 달하는데, '진짜 5인 미만 사업장'은 이보다 훨씬 적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런 부작용에도 정부가 그간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을 주저해온 가장 큰 이유는 사업주의 부담이다. 작은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하게 되면 가산수당, 연차휴가수당 지급 등 사업주의 경제적 부담이 크고, 이를 위한 노무관리도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헌법재판소도 1999년과 지난해 모두 사업주의 비용·행정 부담 문제를 들어 사업장 규모로 근로기준법을 차별 적용하는 현행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그러나 사업주의 부담 문제는 정부 지원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맞선다. 권혁 교수는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을 확대 적용하되, 규범 수용력을 높이기 위한 재정 지원 대책과 노무관리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근로의 최저 기준이 정녕 필요한 곳은 대기업이 아닌 영세사업장"이라고 강조했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연장근로수당과 같이 사업주의 추가 부담이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도기적으로 정부의 금전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며 "근로시간 단축 때처럼 항목별로 시차를 두고 시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고용부도 최근 근로기준법을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상당히 첨예하고, 고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 당장 논의하기는 어렵다"며 "내년 6월 나오는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안 마련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