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박지선씨의 사망을 다룬 보도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관련 보도에서 ‘자살’이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명인의 자살이 모방 자살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와 관련 기관이 '자살' 사용 자제를 오랫동안 권고한 덕분이다. 이에 수년 전부터 자살이 들어갈 자리에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 자살 예방 전문가들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대다수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실제로는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증 정신질환이나 우울증, 조현병, 조울증 등으로 인한 자살은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현실 판단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이 심하면 인지 변화가 생기는데, 일종의 왜곡현상으로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차게 돼요. 우울증으로 인한 절망 때문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성적인 선택으로 자살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아픈 상태에서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벌어진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단어는 실제 자살이 행해진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또 다른 문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잘못된 메시지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보도를 접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자살예방협회 방송문화위원장인 유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이 선택지에 없는 문화권도 있다”며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통스러울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언론에서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런 생각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앙자살예방센터, 보건복지부, 한국기자협회가 2018년 개정한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대신 ‘사망’ ‘숨지다’ 같은 객관적 사망 사실에 초점을 둔 표현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3.0이 나오기 5년 전에 개정된 ‘자살보도 권고기준 2.0’(2013년 개정)에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자제하라”는 권고만 있었다. 권고의 영향으로 보도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라졌으나, 대신 ‘극단적인 선택’이 널리 사용되자 3.0에는 이를 추가로 넣게 된 것이다.
외국의 자살 보도는 대체로 우리나라보다 조심스럽다. 자살을 대부분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사인 추측도 삼가는 분위기다. 지난해 ‘자살방지법’이 시행된 대만은 자살 관련 기사를 주요하게 다루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유명인 자살 보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살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나라에서 자살이 감소했다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자살 관련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기사에 부적절한 내용 등이 있을 때는 해당 언론사에 공문을 보내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중앙자살예방센터 백종우 센터장에게 물었다.
-유명인 자살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나요.
“정신 건강이 보통 수준인 사람들은 안타까움은 느끼지만 큰 영향은 없어요. 하지만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자극이 될 수 있어요. 2008년 10월 최진실씨 사망 때는 자살 사망자가 1년 전 같은 시기보다 1,000명 늘었어요. 최근에는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했어요. 자살보도 권고기준 준수율이 높아진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봅니다.
-그럼 자살보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살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매우 중요해요. 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자살 보도가 좋은 사례예요. 미국 언론은 커트 코베인이 ‘약물 중독과 심한 정신질환이 있었는데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해 사망했다’는 식으로 보도했어요. 유가족들도 그렇게 얘기했고요. 그래서 전설적인 가수였음에도 모방 자살로 인한 사망이 미미했어요.”
-외국의 자살 보도 추세는 어떤가요.
“대만처럼 법으로 자살 보도를 규제하는 나라도 있어요. 우리나라는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하고 있어요. 2017년 12월 샤이니 종현씨가 사망했을 때 해외 언론에서도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단 한 건도 사망 원인을 추정한 기사가 없었어요. 표현도 대부분 ‘숨진 채 발견됐다’를 사용했고 일부만 ‘자살 사망’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보도에서는 자살 원인과 방법을 추정하는 기사가 굉장히 많았어요.”
전문가들은 자살 관련 보도가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평가한다. 과거에는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자살’이라는 단어도 여과없이 사용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자살 방법 등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다만 박지선씨 자살 보도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문제라고 꼽은 부분은 유서 공개였다.
한 언론사는 기사 제목에 ‘단독’ 표시까지 붙이며 유서 내용을 공개했다. 박씨의 유가족이 유서 공개를 원치 않는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3.0’ 역시 유서 보도를 자제하도록 하고 있다. 권고기준은 “유서와 관련된 사항을 보도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합니다. 고인과 유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자살의 미화를 방지하려면 유서와 관련된 사항은 되도록 보도하지 않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서 보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김상욱 부회장은 “박지선씨 사망 후 외래 진료가 크게 늘고 ‘나도 죽고싶다’는 응급전화도 많이 오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유서가 나오면 환자들은 자신들이 쓸 또는 써 놓은 유서를 떠올리게 되고, 구체적인 자살의 프로세스를 생각하는 등 아주 해로운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유현재 한국자살예방협회 방송문화위원장은 “자살예방협회 관계자들이 성명서 발표를 논의할 정도로 해당 보도는 문제가 심각하다”며 “유가족을 배려하지 않고 자살을 상품화한 것으로, 자살보도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마저 무시한 보도”라고 비판했다.
고인이 왜 사망했는지, 모두가 궁금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이다. 자살 사망의 원인은 유가족이 원할 경우 사망 3개월 후 ‘심리부검’을 통해 밝힌다. 심리부검은 고인이 남긴 자료와 지인들 면담을 통해 사망에 영향을 준 원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유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회적으로는 자살 예방책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이 당부했다.
“지금 고인의 사망 원인을 추정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고인을 애도하고, 사회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