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우리는 그녀를 포위하고 포옹합니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힘이 없고, 자연을 넘어서 뚫을 힘도 없습니다. 묻거나 경고하지 않은 채 자연은 우리를 빙글빙글 도는 춤에 끌어들이고는, 우리가 피곤하여 그녀의 팔에서 떨어질 때까지 우리를 돌립니다. 자연은 항상 새로운 형태를 형성합니다.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형태입니다. 모든 것은 새롭지만 또한 항상 오래된 것입니다.”
1859년 11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꼭 10년 만인 1869년 11월 4일 영국에서 창간된 주간지 ‘네이처’의 권두언 첫머리다. 그 주인공은 독일 시인 요하네스 볼프강 괴테. 1832년에 죽은 괴테가 직접 자신의 글을 잡지에 실을 수는 없다.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가 권두언을 쓰면서 괴테가 베수비오 화산과 폐허 도시 폼페이를 여행한 후 쓴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지다’를 한 페이지 반에 걸쳐서 길게 인용한 것이다.
1860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성공회 주교이자 조류학자인 윌리엄 윌버포스와 맞선 헉슬리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신 조부모 중 어느 쪽이 유인원과 친척이냐”라는 윌버포스의 조롱에 맞서 헉슬리는 “과학 토론을 하면서 상대를 조롱하는 데 자신의 재능과 영향력을 사용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유인원을 조부모로 택하겠다”고 대꾸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 불거진 과학적, 신학적, 도덕적 논쟁과 거리를 두었다. 이와 달리 헉슬리는 자신을 ‘다윈의 불독’으로 자처하며 논쟁에 뛰어들었고, 다윈은 헉슬리를 “나를 대신하여 복음, 즉 악마의 복음을 전하는 착하고 친절한 대리인”이라고 하였다.
헉슬리 외에도 다윈을 옹호한 이들은 더 있었다. 다윈이 비글호 항해를 하는 동안에 큰 깨달음을 얻게 한 ‘지질학 원리’를 쓴 찰스 라이엘, 다윈이 항상 먼저 의견을 구했던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 한 종의 모든 구성원 사이에는 유전적 연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 등이다. 이들은 ‘X클럽’이란 이름으로 뭉쳤다.
X클럽은 다윈을 홍보하기 위한 비공식적 모임이었다. 잡지가 필요했다. 헉슬리가 출간하던 ‘자연사 리뷰’가 폐간된 후 X클럽 회원들은 기금을 갹출하여 ‘리더’를 발간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문들 닫았다. 바로 그때 이들에게 노먼 로키어라는 편집자가 알렉산더 맥밀런을 발행인으로 하는 잡지를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네이처’. 네이처는 처음부터 토론을 작정하고 만든 잡지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찰스 다윈이 있다. 찰스 다윈은 1869년부터 죽은 이듬해인 1883년까지 총 40편의 글을 네이처에 발표했다. 대부분 유전, 꽃, 수정, 그리고 본능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X클럽 주도로 만든 네이처가 다윈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다윈을 옹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X클럽 회원은 다윈과 많은 부분에서 충돌했다. 찰스 라이엘은 다윈에게 영감을 크게 주어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종이 변화한다는 다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윈의 불독 헉슬리마저 진화 속도에 대해서는 다윈과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부모의 발달된 특성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다윈의 범생설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논의할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네이처를 창간했다. 그들은 다윈을 사랑했지만 다윈에 대한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중심은 다윈이 아니라 과학이었다.
오늘은 네이처가 창간된 지 꼭 151년 되는 날이지만 현실은 유감스럽다. 과학적 논의의 장이 되어야 할 네이처는 온갖 권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고, 현대의 최대 매거진인 SNS에서는 증거를 바탕으로 치열한 논리를 전개하는 대신 윌버포스식의 조롱이 난무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 나머지 그의 모든 언행에 동의하고, 한 사람이 미운 나머지 그의 모든 언행을 부인한다. 우리의 가슴에서 네이처의 창간 정신인 신뢰가 사라지고 권위주의만 남았다.
괴테는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연을 신뢰합니다. 그녀는 나를 꾸짖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녀의 작품을 미워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