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약자의 아이콘, 고아성

입력
2020.11.04 04:30
18면

편집자주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를 영화 한편만으로는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와 저 영화를 연결지어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자 합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자영(고아성)은 씩씩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쉬 울지 않을 인물이다. 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그는 사내 계급 아래쪽에 있다. 월급은 대졸 입사자보다 적고 승진 기회는 거의 없다. 커피를 타고 구두를 나르는 등 갖은 잡일을 도맡고도 박대받지만 이자영의 얼굴은 밝다. 열심히 노력하면 바늘귀 같은 대리 승진이 가능할 거라는 꿈이 있어서다.

이자영이 영어토익반에서 사용하는 영어 이름은 도로시다. 삶을 긍정하는 자아를 드러낸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속 도로시는 마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지개 너머(Over the Rainbow)’ 소원을 이루기 위해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행동파이기도 하다. 이자영의 영어 이름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야기가 향할 방향을 명시한다.



이자영은 자신의 의지에 기대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인물이다. 장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할로 고아성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다. 출발점부터 그랬다. 14세 고아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괴물’(2006)의 중학생 현서는 약하지만 강인한 인물이다. 괴물에게 붙잡혀 먹이가 될 위험에 처해 있지만, 기지와 용기를 발휘해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2015)의 서봄도 마찬가지다. 서봄은 고등학생 때 출산을 해 상류층 집안 며느리로 살게 된다. 출신 배경은 보잘것없고, 학력은 일천하지만 시댁에서 가장 올바르고 똑 부러진 인물이다. 가진 돈과 권력에 반비례하듯 속물인 시댁 식구들을 향한 서봄의 일갈이 청량한 이유다.



변주도 있다. 공포영화 ‘오피스’(2015)는 고아성의 똑똑한 약자 이미지를 비튼다. 고아성은 보험사 인턴 직원 이미례를 연기했다. 이자영과 엇비슷한 인물이다. 정규직 직원들은 인턴이라는 이유로 이미례와 점심조차 같이 하지 않는다. 이미례는 자신을 ‘직원’으로 인정해 주던 김병국(배성우) 과장이 실종된 후 정규직 직원을 향해 복수를 단행한다.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던 인물이 선보이는 극적인 반전이다.



역사물에서도 고아성은 빛난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의 유관순은 그에게 제격이다. 비폭력으로 무자비한 폭력에 맞선 영웅은 약해 보이나 약하지 않은 고아성의 얼굴에 기대 스크린에서 되살아난다.

고아성의 무기는 큰 눈동자다. 현실을 직시할 때는 반항적이면서도 힘이 빠지면 선하다. 배우에게 고정 이미지는 독이다. 닮은꼴 역할에 재능을 소모하다 사라진 배우가 적지 않다. 고아성은 다르다. 강한 약자 이미지가 되려 장기로 작용한다. 고아성의 연기력, 각 배역의 매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약자가 악에 굴복하지 않거나 세상을 뒤집는 전복적인 이야기를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어 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나오는 1990년대 인기 가요 ‘난 멈추지 않는다’가 극장을 나온 후에도 귓가에 오래 맴도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