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정읍 산내면 옥정호와 대장금마실길
지명부터 산속이다. 정읍 산내면으로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태인IC로 빠져 나와 김제평야와 닿아 있는 드넓은 들판을 뒤로하고 임실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로 방향을 잡는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주변 풍광은 점점 옹색해진다. 그렇게 고갯길을 두어 차례 넘으면 호수를 낀 산마을이 나타난다. 옥빛처럼 맑은 샘물을 담은 옥정호는 섬진강댐으로 생긴 호수다. 지난 여름 폭우 때 수위 예측 실패로 구례와 하동 등 하류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시설이지만, 살포시 가을이 내려앉은 옥정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티없이 맑고 순하다. 마주보며 그림이 되고 거울이 되는 마을 풍광은 그 여름의 상처를 잔잔하게 어루만진다.
산내면 소재지에서 섬진강댐 방향으로 내려가다 터널을 통과하면 왼편에 뜬금없는 안내판이 하나 보인다. 종성리 황토마을 입구에 ‘대장금마실길’ 표지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를 비롯해 호수 주변 5개 걷기길을 의녀 복장의 대장금이 소개하고 있다.
2003년 첫 방영한 드라마 ‘대장금’이 이 산골마을과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정읍시는 황토마을 뒷산이 ‘장금산’임을 들어 이곳을 ‘그녀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고 주장한다. 장금산 일대는 오래 전부터 ‘장금리’로 불렸고, ‘장금초등학교’도 있었다. 장금초등학교는 섬진강댐(1965년 완공) 건설로 단절된 마을 학생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세운 학교였지만, 농촌 인구 감소로 문을 닫고 현재 ‘대장금테마파크’로 변신 중이다. 옥정호와 건너편 마을이 평화롭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장금을 중종의 총애를 받은 의녀로 기록하고 있다. 이 하나의 단서에 살을 붙여 드라마가 완성된 걸 감안하면, ‘산내면 대장금 고향설’은 억지나 마찬가지다. 지역 홍보에 도움이 된다면 없는 캐릭터도 만들어 내는 판에, 있는 지명을 활용했으니 한편으론 정색하고 따질 일도 아니다.
‘대장금마실길’은 사실 정읍 주민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생긴 마을 길에 이정표만 세워 놓았을 뿐, 관광객의 주목을 끌 만한 특별한 시설이 없다. 요란하게 전망대를 세운 것도 아니고, 웬만한 관광지에 다 있는 목재 덱 산책로도 없다. 일부러 꾸미지 않고 생긴 그대로 수수한 길이어서 오히려 푸근하고 호젓하다.
황토마을로 들어서면 바로 앞으로 맑은 호수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울긋불긋 가을빛으로 물든 주변 산자락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수면에 그대로 반영돼 아름다운 가을 풍경화를 그린다. 한때는 가까운 이웃이었을 호수 건너 마을은 이제 마주보며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를 건넨다. 마을 끝머리 언덕배기 전망 좋은 곳에 난국정(蘭菊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댐이 들어서기 전 봄에는 난초, 가을에는 국화로 뒤덮이는 산골 풍경을 비유한 작명이다. ‘정자를 세운 것은 무진년(1928) 가을이요, 비석을 세운 것은 기묘년(1939) 봄이라.’ 섬진강댐 건설로 수몰 지역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안내문에 은근한 마을 자랑과 함께 꽃 향기도 뭉근하게 번진다. 호수 주변 도로를 따라 섬진강댐으로 이동하면 건너편 임실군의 산과 마을이 또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수면에 비친다.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드라마의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대장금의 명대사는 지금도 회자된다. 옥정호 수변 마을과 대장금의 매개를 꼽으라면 단연 감이다. 호수 주변으로 차를 몰다 보면 마을 어귀마다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게 아니라 아예 수확을 포기한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멍이 든 것처럼 꼭지 주변이 거뭇거뭇하다. 무서리를 맞아 상했나 싶은데, 알고 보니 유독 이 지역에 많은 토종 감이다. 검은 먹을 찍어 바른 것처럼 얼룩이 생겨 ‘먹감’ 또는 ‘먹시’라고 한다.
정읍의 나이든 사람들은 옥정호 먹감을 가장 맛있는 감으로 친다. 선홍빛이 감돌면 단단한 감을 따서 단감으로 만든다. 소주와 소금을 섞은 따뜻한 물에 먹감을 넣고 하루 정도 숙성시키면(지역에서는 ‘우린다’고 표현한다) 떫은맛이 사라지고 먹기 좋을 정도로 익는다. 먹감은 껍질이 두껍고 속이 단단해 홍시가 돼도 물컹해지지 않고, 속살이 부드럽게 쪼개진다고 한다. 나뭇결이 고와 소목장들은 먹감 나무를 최고의 목재로 꼽는다.
먹감이 이 시기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요즘 개량종 감나무는 키가 작고 알이 굵지만, 재래종 먹감은 키가 크고 알이 잘다. 한마디로 경제성이 떨어진다. 농촌마을에 노인들만 남았으니 큰 나무에 올라 수확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주된 이유다. 상업성에 밀려 사라지게 될 옥정호 먹감의 운명이 또 안타깝다.
연관성으로 따지자면 정읍 시내의 ‘쌍화차거리’가 의녀인 대장금과 더 어울린다. 쌍화차는 피로 해소와 허한 기혈을 보충해주는 쌍화탕에서 유래했다. 정읍경찰서 앞 골목에 쌍화차를 주 메뉴로 파는 전통찻집이 10여개 밀집해 있다. 작약 숙지황 당귀 천궁 황기 감초 계피 생강 대추 등 9가지 기본 약재에 찻집마다 건강 재료를 추가해 길게는 하루 이상 푹 달여 만든다. 쌍화(雙和)는 부족한 기운을 보완해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다. 정읍에 가면 커피보다 꼭 쌍화차를 마셔보길 권한다.
산내면 소재지에서 가까운 구절초테마공원은 내장산 단풍과 함께 가을철 정읍에서 가장 뜨는 곳이다. 추령천(매죽천이라고도 한다)이 휘감아 도는 야트막한 동산이 온통 구절초 꽃으로 화사하게 변신하기 때문이다.
산내면은 논이 거의 없어 밭농사에 주로 의존해 온 산골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처럼 먹고 살 게 부족한 마을에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구절초가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옥정호의 물안개가 끼는 새벽이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 몽환적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 사진에 이끌려 관광객도 늘었다.
10월 중순 절정을 넘겨 지금은 양지바른 언덕에만 구절초 꽃이 남아 있지만, 일부 구역에 억새와 백일홍을 심어 늦가을 정취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구절초 공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조연은 소나무다.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잡풀과 잡목을 제거했지만 소나무는 그대로 남겨 웬만한 솔숲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운치있다. 솔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또한 예술이다.
공원엔 솔숲 사이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초입의 오르막을 빼면 노약자도 크게 힘들지 않다. 산을 다듬고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데는 인근 칠보면 출신의 독지가 김순희 여사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에서 공원 초입에 ‘꽃바람 아가’ 석상을 세워 놓았다. ‘꽃바람 여인 김순희 이사장이 구절초 꽃밭에서 뒹굴고 놀던 다섯 살 시절의 행복했던 순간’을 형상화했다고 설명한다. 아홉 마디 구절초처럼 숱한 삶의 고비를 넘었을 한 여인의 고향 사랑이 담겨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