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지역 연쇄살인범인 이춘재(56)가 2일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당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내가) 용의선 상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재는 이날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 박정제) 심리로 열린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그는 1980년대 화성과 충북 청주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14건에 대해 "내가 진범이 맞다"라고 증언했다.
이번 재심은 누명을 쓰고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청구한 것으로, 이춘재가 첫 사건이 발생한 지 34년 만에 사건 일체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공개 법정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39분 푸른색 수의에 짧은 머리, 흰색 마스크를 쓰고 증인석에 자리한 이춘재는 재판장이 '오늘 어떤 이유로 이 법정에 서게 됐는지 알고 있느냐'라고 묻자 무덤덤한 목소리로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 그는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 없이 진실만을 말하겠다"라고 증인선서를 한 뒤 신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춘재는 "연쇄살인사건이 영원히 묻힐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당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용의선 상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교도관들이 제소자들의 DNA를 채취해갔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서 곧 알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면서 "범죄 당시 현장에 대해 은폐라든지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DNA 채취하고 금방 경찰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경찰은 바로 찾아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잊고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이춘재는 당시 수감돼 있던 부산교도소에 경찰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재수사 과정에서 가족이 생각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든 것이 다 스치듯 지나갔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면회를 오거나 전화 통화를 걸어왔으나, 범행 자백 후 연락이 끊겼다고 덧붙였다.
이춘재는 "당시 경찰조사에서 진술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프로파일러 때문에 진술을 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진술 거부를 택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춘재는 "경찰이 유전자 감식한 결과를 가지고 와서 조사를 했는데, 첫날은 진술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진술 거부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제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바람에 부인한 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프로파일러인줄 모르고 (경찰이) 여자 형사를 만나보라고 했다"라며 "처음에 안 만나려고 했는데 (프로파일러와)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자백하기로 마음먹고 털어놨다"라고 밝혔다. 이춘재는 "어린 시절부터 전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라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이 있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은) 연쇄살인사건 10건 중 9건(8차 사건 제외)에 대해 진술하라고 했는데, 그걸 빼고 진술하면 진실이 될 수 없어서 범행 모두를 자백했다"라고 덧붙였다.
이춘재는 조사 당시 여성 프로파일러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왜 프로파일러의 손을 만졌냐'라는 질문에 그는 "손이 예뻐서 그랬다. 손이 예쁜 여자가 좋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씨 집에서 박씨의 13세 딸이 성폭행 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을 지칭한다.
이듬해 범인으로 지목된 윤성여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변호인 양측은 모두 이춘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며, 법원은 그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다만 재판부는 언론의 이춘재 실물 촬영 요청에 대해 증인신분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