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 트럼프 최악의 유산 "사실과 거짓의 판단이 무너진 사회"

입력
2020.11.03 04:30
트럼프 낙선해도 대중 신뢰 회복 불가능
동의하지 않은 사실 '가짜뉴스'로 탈바꿈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2017년 1월 20일(현지시간)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 인원을 놓고 논란이 크게 일었다. 한산한 취임식 풍경에 언론이 “역대 최저 지지로 출범한 정권"이라고 혹평하자, 백악관은 즉각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거짓은 금세 드러났고 왜 가짜 정보를 말했느냐는 질문에 캘리앤 콘웨이 당시 백악관 고문은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다.

이후 음모론은 트럼프 행정부의 주류 담론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올해 대선에서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패배할 경우 ‘조작 프레임’으로 다시 미국사회를 찢어 놓을 게 확실하다는 예측이 우세하다. 미 언론은 트럼프 당선 여부와 관계 없이 대선 후유증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가 ‘포스트 트루스(탈진실)’ 시대로 불리는 배경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1일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민주사회의 필수요소인 ‘사실에 대한 대중의 믿음’ 자체가 침식됐다”고 진단했다. 회의론과 부정주의, 믿고 싶지 않으면 믿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사회에 널리 퍼져 대선 이후 정치 담론 전반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의미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리 매킨타이어는 신문에 “(대중 신뢰에 대한) 피해를 완화할 수 있어도 100% 회복할 순 없다”며 “그것이 트럼프가 남긴 유산”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임기 동안 지지층 결집과 정치적 이득을 위해 정치권 및 사회제도의 정당성을 훼손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선거 조작 논쟁이 대표적이다. 그는 6월 선거 유세에서 “우편 투표는 재앙이다. 배달 중 운송업체가 가로챌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국내외 적들에 의해 위조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대선을 두고 “미 역사상 가장 부패한 선거가 될 것”이란 말도 했다. 여론조사는 ‘조작’됐고, 토론 사회자들은 ‘편견’에 가득 차 있으며, 선거 결과는 곧 ‘뒤바뀔 것’이라는 주장을 대통령이 뚜렷한 근거 없이 내뱉는다.

때문에 트럼프 시대에는 사실과 거짓이 판별 가능한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비판도 있다. 영국 BBC방송은 “2016년 대선에서는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한다’와 같은 거짓 보도를 가짜뉴스로 인식했다”며 “하지만 가짜뉴스라는 용어가 대중화한 지금 그 용어는 잘못된 정보가 아닌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뉴스를 가리키고 있다”고 전했다. 데이터 분석업체 팩트베이스에 따르면 트럼프는 2016년 12월 트위터를 처음 시작한 이래 1,378일 동안 2,000번 넘게 가짜뉴스라는 말을 썼다. 거짓이라는 주장 자체가 효과적인 정치 수단이 된 셈이다.

실제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지난달 설문을 보면 미 유권자의 54%는 최근 몇 년간 미국 정치가 거짓말을 더욱 용인하는 풍토로 바뀌었다고 답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대하는 미국민의 태도를 보면 이런 기류가 보다 분명해진다. 의학 학술지 네이처메디슨은 지난달 23일 마스크를 사용하면 내년 봄까지 13만여명의 코로나19 사망자를 예방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백신이 마스크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며 과학계의 조사를 “실수 혹은 잘못된 정보”로 규정했다. 대중에 미치는 결과는 자명하다.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의 공동 연구에서 ‘무증상 확진자도 전파가 가능하다’ ‘미국은 집단면역에 도달했다’ 등 코로나19 관련 질문 6개에 대해 모두 옳게 대답한 사람은 절반(51%)에 그쳤다.

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친(親)트럼프와 반(反)트럼프의 이분법으로 나뉜 세상에서는 지도자가 누가 되든 분열이 한층 심화할 수밖에 없다. 미 NBC 방송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끌어 안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으나, 미국의 사회분열 현실은 매우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하나의 미국’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얘기다. NYT 역시 “트럼프의 후임은 무너진 동맹 신뢰를 회복하고, 정부를 불신하는 대중을 설득하는 등 지난 4년보다 더 큰 위기를 관리해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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