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불을 훔친 자'들의 반란

입력
2020.11.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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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빨간 머리의 날


인류의 1~2%가 붉은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난다. 그 희귀성 탓에 '빨간 머리'는 별종 취급을 받거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곤 했고, 중세에는 '지옥불을 훔친 자' 즉 마녀의 표징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영어권에선 빨간 머리를 'Ginger Hair'라고도 한다. 일부 지역에는 'Kick A Ginger Day'란 게 있는데, 창백한 피부에 빨간 머리를 지닌 사람을, 말 그대로 걷어차는 날이다. 물론 아이들 장난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장난일 수 없을 것이다.

고인류학자들은 크로아티아에서 발굴한 구석기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에서 오늘날 빨간 머리 유전자(M1CR)와 유사한 유전자를 찾아냈다. 그 유전자가 여러 경로로 현생 인류에 전달됐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약 10만년 전 신석기 혁명을 거치며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로 이주한 유럽인이 낮은 자외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즉 비타민D 합성을 위해 피부색을 더 밝게, 머리 색을 붉게 진화시켰으리란 설도 있다.

빨간 머리에 부정적 이미지를 입힌 주체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고대 그리스인에게 빨간 머리는 '그리스적이지 않은(non-Hellenic)' 바베리언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빨간 머리가 많은 북유럽 바이킹도 나쁜 이미지에 일조했다. 빨간 머리의 날(Redhead Day)이 처음 시작된 나라도 북유럽 네덜란드다. 클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빨간 머리에 매료된 아스텐의 한 화가가 2005년 빨간 머리 모델을 구한다고 낸 광고에 무려 150여명이 몰려들었고, 그게 계기가 돼 2007년부터 아예 시 주관 국제 행사가 된 거였다. 매년 8, 9월 이틀 남짓 진행되는 행사땐 전 세계의 빨간 머리들이 수천 명씩 몰려와 예술축제를 벌인다.

11월 5일 미국의 '빨간 머리의 날'은 'Kick A Ginger Day'에 대항해 빨간 머리 두 여성이 2015년 'Love Your Red Hair Day'를 주창하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빨간 머리 에마 스톤의 영화 '라라랜드'가 개봉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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