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내년 4월 서울ㆍ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 공천은 득실이 뚜렷하다. 당헌을 뒤집는다는 비판 한가운데 놓이지만, 2022년 대선의 교두보 성격이 강한 두 선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요컨대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는 행보다. 하지만 민주당은 명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공천을 “책임 있는 도리”로 규정했다. 약속을 파기해도 표의 판단을 받아 보는 것이 책임이라는 주장이자, '당원 찬성'과 '유권자 표'로 면죄부를 얻겠다는 포부다. 여당이 실리를 위해 ‘책임정치’의 정의(定義)까지 뒤트는 행보로 정치냉소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게 책임 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공천 여부를 전 당원 투표에 부치기로 하면서다. 민주당 당헌 제96조 2항은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2015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정치개혁”을 외치며 만든 조항이다.
당원 찬성이 많아야 개정이 가능하지만 지도부가 이미 공천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한 만큼 투표를 사실상 요식행위나 명분쌓기의 일환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당내에선 일찌감치 ‘공천 불가피’가 공공연한 방침으로 굳어진 상태다. 이 때문에 비판 세례가 불 보듯 뻔한 중대결정의 책임을 전 당원 투표에 전가했다거나, 투표를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쓴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민주당은 지난 4ㆍ15 총선에서도 스스로 주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취지에 반해 비례 위성정당을 창당해 소수정당 몫 의석을 사실상 가로채면서도 ‘전 당원 투표’로 비난을 돌파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낯선 책임정치론을 외치는 민주당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이날 “정치인이 사후에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고 주권자가 사전에 권리를 위임할 때 신의, 공적 강제력이 발생하는 게 정치행위의 본질 아니냐”며 “이런 신의를 위반하면서 그게 책임정치라고 주장하는 건 적절하진 않다”고 강조했다. 이어 “책임정치의 본질은 약속을 하고, 이행 여부를 점검 받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분 없이도 재차 다수결만 거치면 된다는 게 책임 정치의 윤리라면,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로 주권자의 의사를 다시 물은 일도 책임정치에 해당하냐는 지적이다. 박 학교장은 “표면 된다는 포퓰리즘, 매번 다시 묻겠다는 직접 민주주의 등은 사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책임정치를 가장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우려했다.
‘책임’의 대상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중대 잘못이 있을 시 선거를 포기하겠다는 정치개혁 약속은 국민을 향해 했는데, 그를 뒤집는 판단은 당원들에게 구하겠다는 것 자체가 궁색한 행동 아니냐”고 꼬집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 역시 3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공천으로 시민 심판을 받는 게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건 해괴한 말”이라고 단언하며 “어째서 집권당이 책임정치를 곡해하고 ‘내로남불’의 덫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비겁한 결정을 당원의 몫으로 남겼으니 민주당은 비겁하다”고 일갈했다.
앞서 야당 시절 쏟아낸 여권 인사들의 비판도 ‘내로남불' 비판의 빌미가 되고 있다. 2017년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이 박탈된 김종태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과 한국당을 겨냥해 “후보를 내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무공천 방침을 바꿔서 다시 공천하기로 했다”며 “참으로 후안무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