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진짜 마흔" 힙합으로 풀어낸 40세 찬가

입력
2020.10.31 04:00
19면
<10> 넷플릭스 '위 아 40'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최근에 멋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코로나19로 인해 잃어버린 2020년을 되찾을 방법이다. 단, 한국인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매년 1월 1일에 동시에 한 살의 나이를 먹게 되는 한국식 나이 계산법 대신,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사용 중인 만 나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단번에 두 살, 생일이 지났다면 한 살씩 젊어진다. 물론 물리적으로 노화에 역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 정도는 바뀌고도 남는다. 2021년이 되어도 어디론가 흩날려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2020년의 나이로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그 오랜 ‘빠른년생’의 악습도 고쳐낸 우리다. 할 수 있다.

이 아이디어는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위 아 40’을 보면서 떠올리게 됐다. 연출과 각본, 주연까지 맡은 라다 블랭크는 영화 속에서 동명의 뉴욕 거주 극작가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곧 마흔’이라는 말을 듣는데 그때마다 ‘아직 3개월이 남았다’고 정정해 준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마흔 살이 될까? 한국식 계산으로는 1년 하고도 조금 더 남은 셈이지만, 만 나이로는 아직 2년 반 정도가 남아 있다. 이미 시간을 번 기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아직 마흔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1990년대에 서른 살을 바라보던 시선과 2020년이 된 지금 마흔 살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하다는 SNS의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참이었다. 서른 언저리에는 세상이 어떤 시선으로 보든 스스로는 젊다고 느꼈다. 어리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나이로는 시시각각 마흔을 향해 질주하는 것 같은 지금은, 마냥 젊지만은 않다고 느낀다.



지금의 내가 과연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무려 미혹되지 않는다는 나이 마흔이 되면, 내 실수나 시행착오에 대한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원제를 직역하면 ‘마흔 살 버전(The Forty-Year-Old Version)’이라는 제목인 이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했다. 아니, 실은 운명 같았다. 시놉시스를 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마흔 살엔 성공한 예술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지, 한물간 극작가가 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다 포기해야 할까? 아니, 내 얘기를 랩으로 해보자. 할 말은 넘쳐나니까.”

그렇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가가 아니라 래퍼가 돼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대화를 친구들과 나눴던 차였다. 성공한 작가가 되는 것과 성공한 래퍼가 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책을 읽는 사람들보다 힙합을 듣는 사람들 쪽이 더 많을 게 틀림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친구들은 ‘아직 늦지 않았어’를 외쳤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작가로서 쓰는 글과 래퍼가 쓰는 가사가 같은 게 아니며, 말이 좀 빠르다고 해서 랩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나에게는 감상자 이상의 깜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담처럼 ‘이 꿈은 기각’을 외치던 차, 라다 블랭크의 이 영화가 나타난 것이다. 나도 마흔, 너도 마흔, 우리는 마흔. 가벼운 라임을 맞춘 산뜻한 랩을 건네면서.



뉴욕에 사는 극작가 라다 블랭크는 오늘도 출근한다. 목적지는 연극 수업 강의를 나가는 고등학교이고, 어제처럼 오늘도 지각이다. 주목해야 할 30세 이하 극작가 30인 중 한 명이었던 그는 가르치는 학생에게 “히트작도 제대로 된 경력도 없는 작가”라며 지적받으며 마흔 직전의 오늘을 살고 있다. 신작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애를 써보고는 있지만,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한 백인 제작자가 그의 면전에서 신작에 흑인 작가로서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하자, 라다 블랭크는 참지 못하고 상대의 목을 졸라 버리고 만다. 되는 일이 없다 못해 얼마 되지 않는 기회조차 망쳐버린 지독한 밤, 그는 거울을 보고 있다가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가사를 랩으로 뱉어낸다.

“왜 생리가 안 터져? 이거 또 시작이네. 배는 나오고 피는 끊기네.”

생리 이야기는 성욕으로 갔다가 무릎의 신경통과 피부의 건조함에 대한 토로로 이어지고, 병원비 걱정으로 춤도 못 추는 지금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게 바로 불어난 체중을 감량하려고 다이어트 셰이크를 입에 달고 사는 마흔 살 흑인 여성 작가 라다 블랭크의 인생인 것이다. 거울을 보며 ‘이게 진짜 마흔’을 외치던 그가 화면을 바라보고 관객과 눈이 마주치는 이 순간부터, 영화에는 힙합 비트가 경쾌하게, 때로 묵직하게 더해진다.

라다가 랩을 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꽂혀서도, 믹스테이프를 만들고 싶었던 어릴 적 꿈 때문도 아니다. 그는 세상에 “40세 여성의 관점”을 넣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워크숍이 아닌 진짜 무대 위로 작품을 올리고 또 월세를 내기 위해서 백인이 원하는 흑인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라다에게는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랩이 더욱 중요하다.

비트를 받으러 간 곳에서 얼떨결에 라다머스 프라임이라는 랩네임을 지은 그는, 진짜 랩을 하기 시작한다. 흑인이고 여성이며 예술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작가인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1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애도를 끝내지 못해 보내주지 못한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가사에 담긴다.

‘위 아 40’은 인종과 나이,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에 대해서 상당히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모든 주제는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절묘한 코미디의 박자를 타고 흐른다. 라다가 작품의 수정을 요구받으면서 괴로워할 때도, 라다머스 프라임으로서의 첫 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때도, 짠한 와중에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선명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와 독특한 편집, 재치있는 대사 이상으로 빛나는 유머가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며, 그 유머야말로 이 영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실제의 라다 블랭크는 방송과 영화, 연극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많은 작품을 쓰고 제작해온 작가로, 거장 흑인 감독인 스파이크 리의 데뷔작 ‘당신보다 그것이 좋아’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의 작가이자 제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위 아 40’은 그의 첫 장편 영화로, 올해 초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어 미국 경쟁 부문 감독상을 받은 이후 빠르게 넷플릭스가 배급을 결정했다. 라다 블랭크의 마흔은 느슨하게나마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영화 속의 자기 자신보다는 화려하게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멋진 일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흔은 어떨까? 아직 만으로 2년 반, 곧 10년의 25%나 남아있으니 예상하기는 이르지만,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이 없는 채로 어정쩡한 과정 중에 맞이하지는 않을지 벌써 조급한 마음이 든다. 20대보다 30대가 훨씬 좋았으므로 40대는 더 좋을 거라는 기대의 한쪽에, 여전히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숨어있다.

이 영화는 그 불안에 대해 ‘나도 그렇다’는 공감을 전해주면서도, 마냥 낙관하기보다는 지독할지도 모를 현실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마흔이라면 이루어야 할 성취가 있다고 말하는 대신, 나다운 내가 될 용기를 내야 하는 나이가 마흔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유머를 잊지 말라고.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뒤로하고, 괜한 어색함에 늘 감싸고 있던 두건마저 벗어 던진 뒤 다이어트 셰이크 대신 감자칩을 먹으며 거리를 걸으면서, 라다 블랭크는 진짜 마흔이 된다. 내 목소리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마흔 살 내 인생이다.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단 하나는 원제의 패러디와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한국 버전의 제목이다. 나라면 한국적 패러디의 묘를 살려 ‘마흔, 잔치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의역할 것 같지만 대중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나만의 부제로만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진짜 마흔 살이 되는 날, 곧 만으로 마흔이 되는 해의 생일에 잔치를 연다면 이 영화를 배경에 틀어 둘 생각이다. 영화도, 라다의 랩도 흘러가게 둘 것이다. 잔치라고 하면 어쩐지 환갑이나 칠순 뒤에 붙여야 할 것 같지만, 마흔에 파티를 열어도 여기가 한국인 이상 그건 잔치이고, 잔치이든 파티든 음악이 은 필요하니까. 거기서는 내 버전의 ‘마흔 살 내 인생’ 정도는 랩으로 쏟아낼 수 있도록 연습은 지금쯤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자, 비트 주세요.

윤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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