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제국은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을 통해 부유한 제국으로 거듭 성장했다. 적어도 헐벗음은 벗어나야 책도 읽고 영화도 보듯, 로마인 역시 살 만해지자 ‘문화인’이 되고 싶었다. 로마의 상류층들은 고대 그리스의 세련된 문화를 동경했다. 그리스 예술품을 사들이더니, 예술품이 동나자 이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스풍으로 집을 짓고 그리스 예술품이나 그 복제품으로 집 안 곳곳을 장식했다.
이제 자랑할 일만 남았다. 그러자면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여야만 했다. 로마인은 고대 그리스에도 ‘홈파티’ 문화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바로 심포지움이다. 이들은 ‘함께 마시다’라는 뜻을 내포한 심포지움을 모방해 ‘함께 살다’라는 의미를 담아 ‘콘비비움’을 고안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106~43 BC)는 그의 역작인 '노년에 관하여'에서 대(大)카토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남겼다. "친구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것을 우리 윗대의 어르신들은 콘비비움(함께 사는 것)이라고 칭했는데 나는 그리스인의 명칭(심포지움)보다 낫다고 생각하네. 중요한 것은 친구들끼리의 만남과 대화인데, 그들은 가장 덜 중요한 것(함께 마시는 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 같거든." 적어도 키케로가 살았던 공화정 시대까지는 로마인에게 콘비비움의 의미는 그러했다.
그러나 콘비비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퇴폐적으로 변질되었다. 키케로가 오래도록 살아 1세기 중반 네로 황제 시대의 콘비비움에 참석했다면, 그리스의 심포지움을 두고 ‘함께 와인 마시기’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자신의 말을 취소했으리라.
사실, ‘와인 마시기’만 빼면 심포지움과 콘비비움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첫째, 심포지움은 식사를 한 뒤 남자만의 방인 안드론으로 옮겨서 와인을 따로 마셨다. 반면 콘비비움은 처음부터 푸짐한 요리에 와인을 곁들였다. 둘째, 심포지움에서는 참석자 모두가 동일한 와인을 마셨지만, 콘비비움에서는 주최자(주인)만 고급 와인을 마시고 손님은 낮은 등급의 와인을 맛보았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심포지움에는 남자만 참석했지만 콘비비움에는 여자도 참석했다.
기원전 2세기 초까지는 콘비비움에도 일반 여성의 참여를 엄격히 금지했다. 여성에게는 음주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음주 여부를 알아내려고 남편과 친척 남자가 불시에 ‘키스’를 요구했을 정도다. 음주 사실이 적발된 여자는 맞거나 쫓겨나거나 이혼당했다. 심지어 그 여자를 죽여도 남자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러 시대가 변했다. 여자에게도 음주가 허용된 것이다. 식품학자들은 그 이유를 식생활의 변화에서 찾았다. 이때부터 마른 음식인 빵이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팍팍한 빵을 삼키려면 목을 축일 음료가 필요한데 와인이 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빵이 주식이 되자 와인 소비량 역시 급격하게 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빵이 바꾼 역사적 혁명이다.
심포지움과 콘비비움에는 차이점이 또 있다. 심포지움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자리였다면, 콘비비움은 불평등하고 독선적이고 오만한 자리였다.
그리스의 심포지움에는 남자 성인 시민만 참석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자유롭게 생각을 논하고 의견을 개진했다. 심포시아르크(주재자)도 모두의 동의하에 뽑았다. 심포시아르크 역시 특권 의식 없이 향연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역할에 충실했다. 함께 마실 와인을 정하고, 너무 취하지 않도록 물과 와인을 적당한 비율로 섞고, 신에게 헌주하고, 얼마나 마실지를 결정했다. 이러한 심포지움에서 와인은 신을 위한 감사이자 관계의 윤활유였으며 흥을 돋우는 촉매제였다. 때론 질펀하게 놀았지만, 질서와 규칙이 있었다.
로마의 콘비비움은 주최자인 주인이 속물 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였다. 최고급 와인과 산해진미로 로마판 주지육림을 열어 자신의 부를 과시한 것이다. 주인은 저 혼자 황금잔이나 보석이 박힌 유리잔에 최고급 와인을 따라 마셨다. ‘나는 너희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듯. 한데 대부분의 로마인은 콘비비움에 초대받으면 영광스러워했다. 어떻게든 주인에게 잘 보여 말석이라도 차지하려 했다. 하여, 주인은 자리 배정은 물론 와인과 음식, 그릇과 잔, 참석자의 수발을 돕는 노예의 배치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했다.
콘비비움은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이라는 방에서 열렸다. 긴 의자 여러 개를 ‘ㄷ’ 자 형태로 놓고,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거나 아예 베개를 베고 누워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주인과 가까운 쪽에는 지체 높은 사람이나 총애받는 사람이 자리했고, 대각선 방향으로 먼 자리는 그 반대되는 사람의 몫이었다.
주인 가까운 자리의 손님은 외모가 출중한 노예에게 최고급 와인과 요리를 시중받았다. 멀리 떨어진 자리의 손님은 외모가 떨어지는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질 낮은 와인과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가끔은 주인에게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심지어 지체 높은 손님을 수발하는 노예에게도 무시당했다. 그럼에도 참석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인을 수발하는 노예에게 아부했다. 음식과 와인을 가져다주는 권한이 노예에게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잘 보여야 푸대접을 면할 수 있었다.
콘비비움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 있다. 고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가 쓴 ‘사티리콘’이다. 작품 2부인 ‘트리말키오의 연회’에 콘비비움의 풍경이 나온다.
트리말키오는 노예였다. 그는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때때로 주인뿐만 아니라 주인 부인에게 성적으로 봉사하면서 신임을 얻어, 총관리인이 되었다. 마침내 주인에게서 자유를 얻음은 물론 막대한 유산까지 물려받아 사업으로 재산을 불려 거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콘비비움을 열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탁자에 “100년 숙성 팔레르눔, 오피미우스”라 적힌 당대 최고급 와인을 내놓아 콘비비움 참석자들을 기죽였다.
피츠제럴드는 이 인물을 모델로 삼아 ‘개츠비’를 탄생시켰다. 그는 소설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로 정해지기 전에는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를 제목으로 고려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트리말키오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오만과 독선이 난무하는 식탁에 이런 사람과 앉아 마시는 와인이 과연 맛이 있을까.
게다가 트리말키오가 내놓았다는 ‘100년 숙성된 와인’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만큼 숙성시킬 보관 환경도, 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무리 오래 숙성해야 1년에서 길어야 2~3년에 불과했다. 당도가 높은 스위트 와인을 비교적 오래 숙성할 수 있었는데, 아테나이오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최고급 와인의 숙성 기간이 5~25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 또한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신빙성이 높지 않다.
재미있게도 스위트 와인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러했지만, 고대 로마에서도 최고급으로 여겨졌다. 포도를 말려 수분을 날린 뒤 당분을 응축시켜 만든 스위트 와인에는 레드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화이트였다. 이런 와인에 평을 다는 사람이 당시에도 있었다. 오늘날의 로버트 파커나, 젠시스 로빈슨, 제임스 서클링이라고 할까. 이들의 말 한마디에 와인 가격이 요동쳤을 테고 부자들의 ‘와인부심’은 활활 타올랐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평론가는 ‘박물지’를 남긴 플리니우스였다. 그는 아미니안, 노멘티안, 아피아나 품종으로 빚은 와인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또한 로마에서 유통되는 일반 와인 91종, 고급 와인 50종, 수입 와인 38종에 등급을 매겼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그랑크뤼라고 할 수 있는 16군데의 최고 와인 산지 목록을 정리했다. 또한 와인을 드라이하고 달콤한 정도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했다. 그가 꼽은 최고의 와인은, 로마 남부의 해안 지역인 라티움과 캄파니아의 경계에 있는 팔레르누스(Falernus, 지금의 팔레르노) 산 경사면에서 생산한 팔레르눔 와인이다. 그 다음으로는 소렌토에서 생산한 와인을 꼽았다.
스트라본이라는 철학자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서쪽에서 동쪽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방의 와인을 평가했다. 그 또한 팔레르눔 와인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 특히 기원전 121년산 와인을 극찬했는데, 같은 해 집정관이었던 오피미우스의 이름을 따 ‘팔레르눔, 오피미우스’라 적힌 와인이었다. 예의 문제적 인간 트리말키오가 콘비비움에 내놓은 와인 말이다.
이처럼 당대 평론가들에게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팔레르눔 와인에는 그에 걸맞은 전설이 녹아 있다. 하루는 바쿠스가 팔레누스(Falenus)라는 농부의 집에 방문했다. 농부에게 극진히 대접받은 바쿠스는 농부가 잠든 사이에 마을의 모든 황무지 산을 포도나무로 뒤덮었다. 농부의 항아리에는 팔레르눔 와인을 가득 채워놓았다고 한다.
신마저 좋아하는 팔레르눔 와인은 상당히 비쌌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파괴된 줄 알았던 폼페이의 유적이 고스란히 발굴되었는데 거기서 재미있는 낙서가 발견됐다. 200여 개나 되는 주점터 가운데 헤도네(Hedone)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주점에 팔레르눔 와인값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에 따르면, 그 값은 일반 와인의 4배였고 최상급 와인의 2배였다고 한다.
사실, 오피미우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장본인이다. 세기의 빈티지로 알려진 기원전 121년은 공교롭게도 오피미우스가 그라쿠스 형제의 세력을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해이다. 개혁에 반대하던 당시의 보수파들에는 기원전 121년산 팔레르눔 오피미우스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와인이 아니었을까.
이 사건은 와인의 역사에서 보자면 꽤나 상징적으로 보인다. 허영심과 권력의 관계와, 교감이 짓눌려버린 콤비비움의 식탁에 기원전 121년산 팔레르눔 오피미우스가 놓인 풍경과 이 사건이 머릿속에 나란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팔레르눔 와인의 맛이 궁금하긴 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마셨다 한들 그 맛을 느낄 수나 있었을까?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콘비비움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굶주렸기에!” 그리스의 플루타르코스도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우리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더불어 함께 먹기 위해 식탁에 앉는다.”
예나 지금이나 허영과 권력의 식탁은 위험한 법. 로마로 통하는 길이 막히게 된 건 바로 그때부터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