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티머스’를 막을 수 있던 순간들

입력
2020.10.28 18:00
26면
존재하지 않는 엉터리 매출 채권이 
우량 채권 대우받은 사기극 수년 지속
허술한 금융 감시체계 믿을 수 있나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2017년 6월. 한국예탁결제원은 정체불명의 비상장회사 사채를 부산항만공사, 한국토지주택 등 공공기관 매출채권으로 종목명을 바꿔 AV자산운용(옵티머스자산운용의 전신)의 자산명세서에 기재해줬다.

옵티머스 사기극의 핵심 장치인 ‘공공기관 매출채권’은 이렇게 태어났다. 매출채권이란 어떤 기업이 건설 공사 등을 진행하면서 수주업체와 계약한 후 특정 기한이 지난 시점에서 대금(매출)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고, 수주업체는 향후 받을 대금을 근거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그런데 공공기관은 민간기업과 계약할 때 대금을 5일 이내에 또는 30일마다 공사 진행률에 따라 지급하도록 국가계약법에 정해져 있다. 한마디로 6개월ㆍ1년짜리 ‘공공기관 매출채권’은 존재할 수 없다. 예탁원은 의심 없이 이런 자산 변경을 계속했다. 예탁원은 “예탁 자산의 진위를 확인할 의무가 없다”며 “우린 무인 보관함 관리자”라고 해명한다. 옵티머스 사태를 막을 수 있던 첫 번째 순간이다.

예탁원에 가짜 ‘공공기관 매출채권’ 등록에 성공한 옵티머스는 이헌재 전 부총리, 채동욱 전 검찰총장, 양호 전 나라은행장, 김진훈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 등을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에 접근해 2018년 3월까지 680억원의 투자를 받아낸다. 그 과정에서 옵티머스가 전파진흥원 투자 책임자에게 금품ㆍ향응을 건넸는지 검찰이 수사 중이다. 옵티머스를 막을 수 있던 두 번째 순간이다.

전파진흥원의 옵티머스 투자가 진행되는 동안 금융감독원은 여러 차례 검사에 나선다. 2017년 7월 내부 횡령과 부실 운영 등으로 자본금이 부족해지면서 경영 개선 명령(적기 시정 조치)을 받을 처지가 된다. 금감원은 8월 옵티머스에 대한 검사를 두 차례 실시한다. 이때부터 양호 전 옵티머스 고문이 금감원 직원들을 만난다. 11월 옵티머스는 경영정상화 계획서를 금감원에 제출했고, 12월 금융위원회에서 ‘적기 시정 조치 유예안’이 통과된다. 옵티머스를 막을 수 있던 세 번째 순간이다.

2018년 2월 옵티머스 내부자가 검찰에 정영제 전 대표와 김재현 대표를 투자금 유용 등을 이유로 고발했고, 10월에는 1호 투자자였던 전파진흥원도 검찰에 수사 의뢰한다. 하지만 2019년 5월 서울중앙지검은 무혐의 처분한다. 무혐의 처분 직후 NH투자증권이 펀드 판매를 시작하고, 마사회ㆍ농어촌공사ㆍ한국전력도 투자에 나서며, 피해 규모가 크게 불어났다. 수사 책임자는 “전파진흥원이 투자금을 회수해 피해가 없었고, 금감원 두 차례 조사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책임을 금감원에 떠넘겼다. 옵티머스를 막을 수 있던 네 번째 순간이다.

환매 중단으로 원금 대부분을 날릴 가능성이 큰 피해액은 5,151억원이며, 이 중 NH투자증권이 84%인 4,327억원어치를 팔았다. NH투자증권 투자 결정 과정에는 김진훈 전 옵티머스 고문이 등장한다. 이후 내부 심사과정을 순탄하게 통과했고, 펀드 환매 중단이 벌어진 올해 6월 이후 상품 검증 과정에서도 옵티머스 측 고문 변호사가 법률 검토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옵티머스를 막을 수 있었던 다섯 번째 순간이다.

‘다섯 순간’은 국정감사와 검찰 수사 등을 통해 드러난 굵직굵직한 순간들만 정리한 것이다. ‘도둑이 들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옵티머스 사기의 경우 수년에 걸쳐 적어도 5마리의 ‘개’(감시 장치)와 여러 번 마주쳤는데, 아무도 짖지 않았다. 한 번만 의심했다면 금방 들통날 ‘공공기관 매출채권’이 오랜 기간 수많은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서 우량 채권 대우를 받은 이 어이없는 사기극을 과연 단순히 불운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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