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보필 했던 ‘이(李)의 남자' 현명관이 본 이건희 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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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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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다시 일어나셔서 제2의 ‘신경영’ 선언을 하세요. 그래야 삼성이 재도약을 하고, 한국 경제도 또 한번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주군'을 떠나 보내야만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운 심정으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있다면'으로 부탁한 질문에 돌아온 팔순 노인의 울먹인 목소리는 그랬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경기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선영에 안장돼 영면에 들어간 28일 '이(李)의 남자'로 알려진 현명관(79) 전 삼성물산 회장과의 전화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회장은 1987년 취임 이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까지 27년 동안 7명의 비서실장이 그를 보좌했다. 현 전 회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바꾸기 위해 가장 급변했던 시기인 ‘신경영’의 초창기 3년간(1993년 11월~1996년 12월) 이 회장 곁을 지켰다.

현 전 회장이 전한 이 회장의 일화와 에피소드에선 ‘재계 거목’의 묵직한 경영철학이 그대로 묻어났다. 현 전 회장은 무엇보다 "이 회장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담겨 있었다"고 추억했다.

현 전 회장은 먼저 이 회장에 대해 '인재 제일 주의'를 떠올렸다. "우수 인재를 뽑아 오는 것을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반대로 인재를 빼앗긴 경영진에는 어느 때 보다 심한 호통과 질타가 뒤따랐습니다. 특급조리사를 포함한 20여명의 직원들이 당시 막 문을 열었던 남산 힐튼호텔로 옮겨갔거든요." 현 전 회장은 자신이 호텔신라 대표 시절인 1989년 이 회장에게 불려가 받았던 호된 질책의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편견 없는 인사’ 역시 이 회장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라고 했다. "저도 편견 없는 인사의 수혜자였습니다. 삼성 공채도 아닌 관료(감사원) 출신으로 호텔신라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제가 삼성그룹의 '2인자'인 비서실장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현 전 회장은 당시 이 회장의 큰 누나인 '이인희의 사람'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 회장은 2년여 동안 눈 여겨 봤던 현 전 회장을 과감하게 발탁했다. ‘신경영’ 선언과 함게 과거와의 단절을 원했던 이 회장이 사내 인맥도 없었던 현 전 회장을 기용했다.

이 회장만의 독특한 현장경영도 소개했다. ‘위기’와 ‘변화’를 줄곧 강조해온 이 회장은 1993년 삼성 주요 사장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소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미국까지 날아온 경영진에게 이 회장은 '백화점과 가전제품 매장을 돌며 쇼핑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삼성 가전 제품이 ‘싸구려 제품’처럼 매장 뒤편으로 밀려나 있는 반면 일본의 소니 제품은 고객들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느낀 이 회장의 참담함을 사장단도 경험해 보라는 뜻이라고 했다. "국내 최고라는 자만심에 차 있는 사장단에게 우리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는 3류라는 것을 직접 깨우쳐주기 위해 미국까지 불렀던 겁니다." 현 전 회장은 당황했던 27년전 상황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현 전 회장은 이 회장 사후 그려질 삼성그룹의 미래 모습도 내비쳤다. "이 회장이 1류 글로벌 기업의 틀을 만들어 놓았고, 이 부회장이 사실상 회장직을 수행한 지도 오래 됐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이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이미 단단하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다만 ‘이재용 시대’를 맞이한 삼성의 먹거리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 점은 보강해야 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삼성의 주력 제품들은 모두 ‘이건희 시대’ 제품들이라는 게 현 전 회장의 생각이다. 세계 일류 제품이 되려면 10년 넘는 시간 동안 투자와 실패를 반복해 가면서 제품을 다듬어 가야하는데 그럴 수 있는 후보 제품들이 눈의 띄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삼성과 우리나라 경제의 앞날에 대해선 긍정적인 전망도 남겼다. “앞으로 이건희 같은 선견지명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한둘은 더 나와야 삼성과 한국 경제가 또 한번 도약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인터뷰 끝머리에 전한 그의 메시지에선 강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김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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