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5,060자 항미원조 연설에 '한국' 배려는 한 글자도 없었다

입력
2020.10.28 14:00
24면
떠들썩했던 항미원조 70주년 행사가 남긴 것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올해도 항미원조 행사 키워드는 '미국'
시진핑발언 10년 전과 흡사하나 "전쟁끝내는 전쟁을" 호전성 첨가
지난달 중국군 유해 117구 송환 불구 한국에 대한 언급은 전무
시 주석 연설에서 잊힌 나라로…대중 외교 진중한 고민 있어야

중국이 떠들썩한 항미원조(抗美援朝) 70주년 행사를 가진 이후 국제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미국과 맞서고 조선을 돕는다는 의미의 항미원조는 중국이 1950년 한국전쟁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다. 중국은 20년 전인 2000년에도 항미원조 행사를 요란하게 개최했던 경험이 있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군 F-117 스텔스 전투기가 세르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 미중 관계는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선 올해도 마찬가지다. 항미원조 이벤트의 키워드는 이번에도 역시 ‘미국’이다.

2년 전 무역전쟁으로 촉발된 미중 갈등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더욱 악화되었다. 양국 관계는 왕이 외교부장의 말대로 수교 이후 “가장 엄중한 국면”(最嚴峻的局面)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번 항미원조 7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전쟁 때처럼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을 포위해 원대한 '중국몽'의 야망을 좌절시키려는 미국의 시도에는 단호하게 맞서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시 주석 발언의 핵심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힘을 모으자”(pooling strength for national rejuvenation)라는 타이틀로 정리했다. 항미원조는 중국 인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한 ‘재료’인 셈이다.

10년 전 발언과 어떻게 달라졌나

일각에선 이번 시 주석의 항미원조 발언이 10년 전 그가 국가부주석일 때의 발언과 별반 차이가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역사마저 부정하고 △승전국도 중국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참전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강조하는 점 등은 과거와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이건 중국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역사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중국공산당에선 연설 내용이 과거와 차이를 보였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 왜 발언이 달라졌느냐고 비판을 받는다. 다른 발언은 다른 해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요 역사적 사건 기념일에 나온 중국지도자들의 연설을 비교해보면 매년 지루할 정도로 비슷하며, 중국 누리꾼들이 이를 패러디할 정도다. 이번 시 주석의 연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의 개입을 묘사하면서 ‘제멋대로’(悍然)라고 표현했던 10년 전의 형용어가 다시 고스란히 들어갔다.

분석의 초점은 과거 발언과 얼마나 비슷한가가 아니라, 유사성 속에서도 어떤 미세한 차이가 있는가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항미원조연설에는 첫째, 10년 전에 없던 ‘대국’(大國)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중국은 “제국주의 침략의 확장을 막았고, 한반도를 안정시켰으며,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지켰다”라고 주장했는데, 한국전쟁 참전이 중국이 세계에 ‘대국의 지위’를 드러낸 첫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2013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과 ‘동급 대우’를 요구한 시진핑의 ‘신형대국관계’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이 “미군 불패의 신화를 깼다”(打破了美軍不可戰勝的神話), 이에 “전 세계가 놀랐다”(震動了全世界)는 표현으로 구체화된다.

둘째, 전에 비해 확연히 공세적이다. 10년 전 연설 요지는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배워서 “중국특색사회주의를 더욱 발전시키자”로 압축된다. 이는 명백히 ‘국내용’이다. 그러나 이번엔 미국을 겨냥한 대외적 메시지와 함께 국내용 메시지에도 “전쟁을 하려면 확실히 전쟁을 끝내는 전쟁을 해야 한다”(以戰止戰) 등 공세적이고 호전적인 내용이 첨가되었다. '침략자'라는 표현은 이전에도 쓰였지만 이번에는 '서방 침략자'(西方侵略者)라고 더 정밀하게 규정했다. 중국 정치 문맥에서 '서방'은 종종 '미국'으로 환치된다. 즉 이번 연설은 미국을 향한 '맞춤형 메시지'가 많이 고려됐다.

북한의 열병식처럼 중국에서도 행사규모는 정치적 중요성을 가늠하는 확실한 척도다. 10년 전 연설은 ‘좌담회’였지만 이번에는 ‘대회의’(大會)다. 더불어 중국 측은 시 주석의 연설 앞에 굳이 ‘중요강화(重要講話)'라고 표시했고, 신화통신은 시 주석 발표문에 ‘공식적 권한을 받아서 발표함’(受權發佈)이라고까지 표기했다. 공산당 선전부 실무 관리들이 지도자 연설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중국 애국주의 배후의 공산당 선전부

이번 떠들썩하게 치러진 항미원조 70주년 행사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이하 선전부)의 작품이다. 중국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국민당과 내전을 벌일 때부터 선전을 국가 통제와 민심 이반 방지 수단으로 매우 중시했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여론을 ‘전쟁터’라고 했고, 실제로 중국은 전쟁을 치를 정도로 치열하게 여론전에 임한다. 중국에서 선전부는 장관급 위상에다, 그것도 모자라 중국 최고지도부의 일원인 왕후닝 정치국 상무위원이 중앙선전사상공작영도소조 조장울 맡아 선전부문을 상위에서 다시 총괄한다. 선전은 국가 차원의 전략적 행위이며 이는 국내와 대외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가 목격한 올해 중국의 모든 항미원조 열풍은 국가 차원에서 연출된 행위이고, 이 점에서 종전과는 다른 과한 제스처의 노림수를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이 70년 지난 한국전쟁을 올해 왜 갑자기 부각시키는지, 관련 뉴스와 담론 및 영화와 다큐멘터리까지 만드는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BTS의 '한국전쟁' 발언을 중국 관영 환구시보가 선정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중국 내 BTS공격에 불을 지핀 것, 국제 여론이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가자 중국외교부가 진화에 나선 것 모두 배후에 선전부가 있었다. 중국 언론이 이번 기념식 행사 준비와 관련한 정부부처를 나열할 때 중국 외교부 앞에 선전부를 먼저 거명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다.

시 주석 연설에 나오는 미국과의 대립적 내용은 이미 훼손된 미중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내 선전의 관점에서 보면 항미원조는 중국 인민들의 애국심 고취 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재료다. 미중 신냉전 시대에 중국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논의하는 19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19기 5중전회)와도 때를 맞췄다. 미국 대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강경 메시지를 내놓음으로써, 누가 다음 미국 대통령이 되든 중국은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이란 항쟁메시지를 선제적으로 제시했다.

한국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항미원조에서 조선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다. 시 주석은 연설에서 중국이 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북한과 ‘함께’(一道) 이뤘다고 했다. 그 전쟁에는 한국도 있었지만 그의 5,060자 연설에서 ‘한국’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지난달 한국은 한국전쟁 중 사망한 117구의 중국군 유해를 송환했다. 6년 만의 최대 규모다. "양국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한국 정부 노력의 일환이다. 그런데 시 주석은 한국전쟁 참전이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10년 전 말만 반복했다. 중국의 이웃이며 한국전쟁 당사자인 한국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시 주석의 연설에서 한국이 '잊혔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의 대중 외교에 진중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주목받는 중국전문가다. 미국 그리넬대 학사, 미국 하버드대 석사를 거쳐 중국 칭화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베이징에서 11년간 거주했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팬택펠로, 잘츠부르크 글로벌 펠로를 역임했다. 지난해 '미·중 전쟁의 승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를 출간했고, 올 7월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미중 新냉전 개막, 한반도의 운명은?'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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