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길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봉쇄, 규제 등 지구촌을 ‘통제 사회’로 만들었다. 그러자 사라졌던 고대 관습은 되살아나고 문명의 이기는 자취를 감추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남태평양의 고도 이스터섬은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50년 전 소멸된 관습이 다시 주민들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 반면 바쁜 현대인의 돈주머니가 돼줬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현금 사용이 급격하게 줄면서 효용 가치를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감염병 시대 ‘절제의 미덕’이 생활 습관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칠레 해안에서 서쪽으로 3,500km 떨어진 작은 섬 이스터는 아름다운 자연과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다. 그러나 올해 3월 코로나19에 걸린 관광객 탓에 주민 700여명이 집단감염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환자는 5명에 그쳤고, 이후 감염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스터 주민들은 고대 관습인 ‘타푸’와 ‘우망가’ 덕분에 바이러스 침투를 막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금기를 뜻하는 터부(taboo)의 기원인 타푸는 폴리네시아의 오랜 전통으로 지위가 높은 족장이 명령을 내려 부족원들의 삶을 제약하는 행태를 말한다.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정신적으로 절제하고 공유를 금하는 게 핵심이다. 세월이 흘러 타푸는 산란기 어획 금지와 같은 섬의 규칙으로 변했지만, 최근 50년간 관광객이 밀려 들면서 자연스레 없어졌다. 그러나 코로나19는 타푸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냈다.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남에게 접근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며, 큰 소리로 논쟁하지 않는 등 사회적 접촉을 최소화하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은 타푸와 딱 들어맞았다.
우리의 품앗이 격인 공동체 협업 의식 우망가도 다시 활성화됐다. 이스터섬은 연간 10만명 이상의 관광 수입에 의존하는데, 3월부터 모든 항공편이 취소되면서 경제적 타격이 극심해졌다. 주민들은 남보다 많으면 나눠 먹고,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전하며, 건강한 상태라면 일손이 돼 주는 우망가를 떠올리고 현대적으로 적용했다. 실직한 관광가이드는 젊은 세대에게 섬의 역사를 교육하고, 다이빙 강사들은 바다 속을 샅샅이 뒤져 2톤 가량의 쓰레기를 제거하는 식이다. 섬 행정책임자인 페드로 에드먼즈 파오아는 26일(현지시간) “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회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 봤다”며 “이 참에 자급자족을 확산시켜 2030년까지 쓰레기 없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일 2만명의 코로나19 환자가 쏟아지는 영국에서는 앞으로 ATM을 박물관에서나 볼지도 모를 일이다. BBC방송은 이날 영국 우편당국이 ATM 600대를 2022년 3월까지 폐기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우체국 전체 ATM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감염병 확산 이후 현금뿐 아니라 ATM 활용이 급감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수도 런던에선 4~9월 ATM 이용률이 전년 동기 대비 최대 80% 줄었고, 전역으로 확대해도 48%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영국에서는 5만5,000여개의 ATM이 운영 중이다. 3월 코로나19 1차 대유행 당시 이미 7,200대가 폐기됐다. 상점, 공항, 술집 등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들이 봉쇄 조치로 문을 닫아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 탓이다. 지난달까지 영업을 재개한 곳도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늘도 있다. 온라인 쇼핑과 카드 사용은 증가하고 있으나, 디지털에 익숙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금융컨설턴트업체 엔리오는 “많은 이들이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속도에 불편해 하고 있다”며 “누구나 디지털 결제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며 현금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지불 수단”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디지털에서 소외된 농촌과 빈곤 지역의 피해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듯, 우편 당국은 “유지되는 ATM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1,600만파운드(235억원)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