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추기경이 탄생했다. 인종차별 문제 등 사회 현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어서 미국은 물론 가톨릭계의 진보적 의제 설정을 주도할 적임자로 평가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5일(현지시간) 8개국 13명의 로마 가톨릭 신규 추기경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흑인 사제인 윌튼 그레고리(72) 워싱턴 대주교가 포함됐는데, 미국에서 흑인 추기경이 배출된 건 처음이다. 그레고리 대주교는 성명을 통해 “매우 감사하다”며 “겸손한 마음으로 교황과 더욱 긴밀히 협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아프리카 르완다와 동남아시아 브루나이 등 가톨릭 소외 지역의 대주교 2명도 추기경에 선임됐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그레고리 대주교는 4년 만에 추기경이 된 미국인”이라며 “그의 선임은 수세기 동안 흑인들을 권력에서 배제한 가톨릭교회가 최근 노예제도 및 인종차별주의와 관련한 논쟁이 확대되는 국면에서 이룬 성과”라고 평했다.
그레고리 대주교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시카고 태생인 그는 1958년 가톨릭중등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가톨릭을 믿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학교는 흑인 학생들의 입학이 어려웠으나, 백인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면서 입학이 결정됐다. 그는 입학 6주 만에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레고리 대주교는 애틀랜타 대주교로 재직하던 지난해 워싱턴 첫 흑인 대주교에 임명됐고, 미 가톨릭주교회의 회장도 지냈다.
그는 사회이슈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참여 종교인'이기도 하다. 올해 5월 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는 계속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처하고 있지만, 인종차별 바이러스도 다시 드러났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향해서도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6월 백악관 인근에서 무장 경찰들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이용해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를 해산시킨 뒤 트럼프 대통령이 이튿날 워싱턴의 한 가톨릭교회를 찾아 성경을 들고 사진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레고리 대주교는 “예배와 평화의 장소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구실로 진압 수단을 동원해 시위대를 침묵하게 하고 협박했다”고 비난했다.
얼마 전 교황의 동성커플 인정 발언 직후 흑인 추기경까지 임명되자 바티칸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NYT는 “7년째 재임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노력이 교회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