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정초석 글씨 이토 히로부미 친필 맞았다

입력
2020.10.21 12:40
문화재청이 확인… “새기는 과정에서 서예 특징 못 살리고 정교함 떨어져”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 머릿돌 글씨 ‘정초(定礎)’는 이미 알려진 대로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친필이 맞았다.

문화재청은 전문가 현지 조사 결과 사적 제280호 ‘서울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 글씨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1일 밝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한국은행 정초석 글씨가 이토 친필이라는 주장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서체 전문가 3인으로 구성된 조사단이 20일 현지 조사를 벌였다. 문화재청은 “조사 결과 정초석에 새겨진 두 글자 ‘定礎’는 이토 히로부미의 묵적(먹으로 쓴 글씨)과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하게 내려쓴 획 등을 종합해 판단할 때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어 그의 글씨임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조사에는 일본 하마마쓰(浜松)시 시립중앙도서관 누리집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붓글씨와 1918년 조선은행이 간행한 영문 잡지 ‘Economic Outlines of Chosen and Manchuria’(조선과 만주의 경제 개요)에 실린 정초석 사진 등 관련 자료가 참고됐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이번 조사는 1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대상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토 친필이 머릿돌에 새겨졌다는 내용이 담긴 조선은행 간행물을 제시하며 국민적 관심이 커지자 진행됐다.

이번 조사에서는 친필 여부 확인과 더불어 글씨에 대한 평가도 이뤄졌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획 사이를 붙이고, 붓 지나간 자리에 비백(빗자루로 쓴 자리처럼 보이는 서체)을 살리지 못하는 등 글씨를 새기는 과정에서 서예의 특징을 잘 못 살렸고 정교함도 떨어진다는 의견이 제시됐다고 문화재청은 전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초석에서 정초 일자와 이토의 이름을 지우고 새로 새긴 글씨 ‘융희(隆熙) 3년 7월 11일(1909.7.11.)’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필치로 보인다는 견해도 개진됐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일본 잔재를 없애고 민족적 정기를 나타내려고 이 전 대통령이 쓰고 이를 석공이 새겼으리라는 게 문화재청 측 추정이다. 융희는 1907년부터 사용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다.

문화재청은 이번 정초석 글씨 고증 결과를 서울시(중구청)와 한국은행에 통보할 예정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한국은행이 내부 검토 뒤 정초석 글씨에 대한 안내판 설치나 ‘정초’ 글 삭제 등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하면 문화재청이 관계 전문가 등의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종합적인 관리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초석의 운명은 안갯속이다. 전용기 의원은 국감에서 “하루라도 빨리 친필 고증을 마치고 정초석 철거 등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식민지 잔재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인 만큼 역사 회고와 연구의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문화재청 역시 안내문 설치 등을 통해 머릿돌을 남겨 두고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1907년 착공된 서울 한국은행 본관은 1909년 정초 뒤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된 건축물이다. 광복 이후인 1950년부터 한국은행 본관으로 사용되다 1987년 신관이 건립되면서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권경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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