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배달만 뛰나요? 코로나발 '디지털 뉴노멀' 투잡 지형 바뀐다

입력
2020.10.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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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김모(36)씨는 지난달부터 부업을 시작했다. 하루 2, 3시간씩 노트북에서 각종 명품시계 디자인을 화면에 띄운 뒤 각 위치마다 로고와 눈금, 시곗바늘 등을 표시하는 일이다. 단순 반복 작업이다 보니, 지루할 때도 있지만 월 100만원 가량의 수입에 만족하고 있다. 김씨의 업무는 소위 '데이터 라벨링'. 인공지능(AI)이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도록 이미지나 텍스트, 오디오 등 비정형 데이터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일이다. 김씨가 만든 디자인 데이터는 스마트워치용 배경화면 전문업체로 전달되고 이 업체에선 해당 데이터로 명품 디자인 도용 일당을 잡아내는 AI를 개발한다. 김씨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었는데 아이가 어려 정해진 시간에 고정적으로 일하기 힘들었다"며 "지금은 업무 강도도 높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시간에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유행처럼 번진 '투잡'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 주로 대리운전이나 배달 등을 포함해 오프라인에서 머물렀던 투잡의 범위가 디지털 세계까지 진입한 양상이다. 디지털 자원 활용 역량에 따라 투잡의 지형도가 달라지는 뉴노멀(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일하고 싶은 사람과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을 연결하거나, 능력을 사고팔고자 하는 개인들을 연결하는 플랫폼들의 존재감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직장인들의 투잡 상위 1~3위가 매장 알바, 대리운전, 택배배달 등에 쏠려 있었지만 플랫폼을 통해 부업을 찾고 재능을 공유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양상이다.

김씨에게 일거리를 가져다준 에이아이스튜디오의 경우엔 데이터 가공 작업자와 기업을 연결하는데, 최근 학생에서부터 주부나 취준생 등 비전문가들의 참여가 늘고 있다. 데이터 자동 분류 기능 등 데이터 가공에 필요한 프로그램이 함께 제공되면서 전문가들이 주로 해왔던 업무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 덕이다. '위시캣'으로 알려진 업체에선 기업들이 계획한 프로젝트를 등록하면 공개 입찰 방식으로 정보기술(IT) 개발자들이 지원하는 IT 전문소싱 플랫폼을 운영 중이다.

재능 공유로 돈을 버는 플랫폼도 유용한 투잡 도구로 떠오르고 있다. 숨은 고수와 고객을 연결한다는 의미의 '숨고'에선 이사, 인테리어, 청소부터 과외, 운동까지 약 1,000가지 서비스가 연결돼 있다. 숨고 운영사 브레이브모바일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세가 가팔랐던 3월 서비스 요청 건수가 감소했다가 5월 이후에는 완전한 회복세를 보였다. 올 2월 대비 6월 중순 과외, 페인트 시공, 리모델링 등 주요 서비스 요청 건수가 평균 71% 뛰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 기간엔 해외에 발이 묶인 유학생이나 프리랜서 등이 고수로 등록한 경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일본에서 생활하다 지난해 10월 독일로 건너간 20대 직장인 신가영씨는 "상점도, 학교도 모두 문을 닫았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웠다"며 "매칭 플랫폼 덕분에 독일에서 일본어 화상 과외를 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인 신은혜씨는 영어 과외와 영상 편집 수업을 시작했다. 신씨는 "셧다운으로 학교나 직장을 갈 수 없게 돼 비자 문제가 생기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며 "숨고로 본격적인 레슨을 시작했는데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플랫폼과 같은 디지털 자원 활용 능력에 따라 경제활동의 질도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노성운 에이아이스튜디오 대표는 "노동 환경과 시스템이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어 개인이 직업 형태나 패턴, 방법을 직접 결정할 수 있게 됐다"며 "시장이 유연하게 바뀌면서 추가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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