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과 단풍이 빚은 1000개의 절경…설악산 '가을 본색' 맛보기

입력
2020.10.2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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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속초 설악산과 상도문 돌담마을



코로나19 속에 깊어 가는 가을이 유난히 야속하다. 단풍색이 고울수록, 가을빛이 찬란할수록 더 싱숭생숭하다. 지난 16일 설악산 천불동계곡을 다녀왔다. 웬만한 산은 하나를 보유하기도 힘든 절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골짜기마다 기암과 어우러진 단풍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설악산 중턱을 물들인 단풍은 산 아래로, 남쪽으로 흘러 한 달가량 전국을 화려하게 수놓을 것이다. 도심의 창문 너머로도 색깔 고운 단풍을 볼 날이 머지않았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코로나 때문에 단풍 구경 떠나기 힘든 이들을 위한 맛보기 용이다. 내년 혹은 훗날 설악산 단풍 산행을 계획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


위아래로 황홀경, 천불동계곡 타박타박 3시간

설악산 등산 코스는 어디 하나 쉬운 게 없다. 설악산의 ‘악(嶽)’은 뿔처럼 바위가 우뚝 솟은 큰 산이라는 의미다. 험한 산, 즉 악산(惡山)과 동의어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도 없다. 정상인 대청봉 꼭대기나 주 능선까지 갈 요량이 아니면 선택지는 다양하다.

천불동계곡은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동쪽 일대, 외설악을 대표하는 골짜기다. 신흥사에서 출발해 비선대(설악산 소공원에서 3km)를 지나 양폭대피소(비선대에서 3.5km)까지 이어지는 ‘양폭코스’의 일부 구간으로 설악산의 깊은 속살을 파고든다. 설악산 국립공원은 코스 난이도를 비선대까지 구간은 ‘쉬움’, 양폭대피소까지는 ‘보통’으로 구분한다. 전체 6.5km를 걷는 데 편도 3시간가량 잡는다. 이 구간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오련폭포는 양폭대피소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왕복 12km, 하루가 꽉 차는 코스다.


신흥사를 지나 비선대 가는 길로 접어들면 그늘진 숲 사이로 평탄한 아스팔트 길이 1km 넘게 이어진다. 그 험하다는 설악산이라는 게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계곡과 조금 떨어져 있어서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소나무와 활엽수가 빼곡해 바람소리마저 잠잠하다. 중턱보다는 단풍이 많이 늦는 편이다. 누런 기운이 감돌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16일 기준) 짙은 녹색 터널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탐방로가 끝나면 얼마간 흙길이 이어지고, 비선대를 약 600m 남긴 지점부터는 계곡을 따라가는 돌길로 변한다.








계곡에는 하얀 바위에 반투명의 초록색 물이 고이고 흐른다. 제법 넓은 물웅덩이 근처에 ‘와선대(臥仙臺)’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옛날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다가 너럭바위에 누워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던 곳이라는 전설이 함께 적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너럭바위는 사라졌지만 집채만한 바위가 계곡 곳곳에 널려 있다.

이곳부터 조금씩 오르막이 시작되지만 등산이라 할 수준은 아니다. 완만한 산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갑자기 계곡 오른편으로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 드디어 비선대(飛仙臺)다. 웬만하면 하늘거리는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날아간 곳이라고 얘기할 법한데 비선대 전설의 주인공 역시 마고선이다.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솟은 봉우리는 꼭대기가 3개로 갈라져 우람하면서도 아찔하다. 선녀의 놀이터로는 아무래도 험악하다.

하얀 물줄기가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바위 주변에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증사진’을 찍을 방법이 없으니 방명록을 남긴 셈이다. 탐방로를 내기 힘들었던 시절, 대부분의 묵객이 이곳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던 듯하다.





비선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천불동계곡이 시작된다. 골짜기는 점점 깊어지고 봉우리는 더욱 험악해진다. 좁아진 길을 한 굽이 돌 때마다 깎아지른 바위봉우리가 연이어 가로막고 있으니 감탄사 연발에 발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가파른 바위 사이에 발붙인 소나무며, 경사진 땅에 뿌리 내린 나뭇가지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더해지니 어느 한곳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하얀 바위를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한없이 맑고 투명해 위아래로 황홀경이다. 수없이 많은 기암괴석을 불상에 비유한 천불동이다. 하나만 있어도 자랑거리인 절경을 1,000개나 보유한 계곡이다.

경사는 심해지고 발걸음은 느려지지만 힘든 줄 모르다. 막다른 골목인 듯싶은 계곡은 귀신 얼굴을 닮았다는 귀면암 고개를 넘으면 한층 깊어진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오련폭포에 닿으면 설악산을 왜 단풍의 기준으로 삼는지 이해하고도 남는다. 새하얀 물줄기가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다 고이고 미끄러졌다 다시 흐른다. 그렇게 생긴 다섯 개의 하얀 웅덩이마다 푸르스름한 옥수가 담겼다. 폭포 상단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억겁의 세월에 주름 잡힌 암벽이 액자처럼 걸려 있다. 계곡에서 산비탈로 단풍까지 고우니 감탄사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신흥사는 천불동계곡으로 가는 탐방로뿐만 아니라 울산바위, 비룡폭포 코스 출발 지점이고 권금성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있어 단풍철이면 더욱 붐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은 필수이고, 거리두기에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단풍철에는 신흥사 앞 소공원주차장(5,000원)에 차를 대기가 쉽지 않다. 아래쪽 B지구(소공원까지 걸어서 20분), C지구(40분)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걷는 게 오히려 빠르다. 주차장에서 신흥사 입구까지 운행하던 셔틀버스도 올해는 운영하지 않는다.


설악산의 관문 상도문 돌담마을, 67년 만에 열린 바다향기로

명산이 코앞이니 웬만한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설악산 초입의 상도문마을은 대부분 있는 줄도 모르고 스쳐가는 곳이지만,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속초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속초 바닷가가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외지인의 주도로 발전한 곳이라면 이곳은 속초 원주민들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 자락이지만 들도 제법 넓어 아늑하고 풍성하다.




상도문마을은 요즘 돌담이 예쁜 마을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마을의 모든 골목이 돌담으로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마을 앞을 두 가닥으로 흐르는 쌍천에 흔한 게 돌덩이이니 자연스럽게 흙보다 돌이 담쌓는 재료가 됐다. 토담에 비하면 차갑고 딱딱하지만 닳고 닳아 둥글둥글한 질감이 이를 보완해준다. 담장 위에 올린 돌멩이 그림도 정감을 더한다. 골목을 걷다 보면 참새 부엉이 고양이 강아지 그림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발갛게 단풍이 오른 담쟁이넝쿨도 돌담에 제격이다.

골목을 돌 때마다 나타나는 구곡을 소개하는 글귀도 흥미롭다. 상도문마을 구곡은 쌍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로 지금은 두 번째 물굽이 ‘학무대’ 부근에 ‘학무정’이라는 정자만 남아 있다. 이 마을 출신 구한말의 성리학자 오윤환(1872~1946)이 세워 전국의 선비들과 교류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어귀에 작고 소박하게 지어 오히려 기품이 느껴진다.






정자 뒤편 솔숲 산책로도 운치 있고, 하천 옆 둑길을 걸어도 좋다. 둑길 끝에는 사발을 엎어 높은 것처럼 둥그렇게 쌓은 돌탑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움직이는 배의 중심을 잡는 돛이라는 의미로 ‘행주석범(行舟石帆)’이라 부른다. 배 형상을 한 마을이니 그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행주석범에서 제방 길을 따라 걸으면 우락부락한 설악의 능선도 한결 부드럽게 보인다.

상도문 돌담마을에서 약 5km를 내려오면 동해 바다다. 대포항이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데 비해 바로 뒤편 외옹치는 조금 낯설다. 옛날 양양에서 속초로 통하는 고갯길로, 바다로 툭 튀어나온 지형이 옹기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는 데서 비롯한 지명이다.







일대는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2018년 일반에 개방됐다. 언덕 꼭대기에 롯데리조트가 자리 잡았고 해안 절벽을 따라 산책로가 개설돼 있다. 이른바 ‘바다향기로’다. 목재 덱 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언덕길에서는 속초해변과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부 구간에는 해안 경계 철조망과 초소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철조망 조형물 사이로 이북에 고향을 둔 주민들이 정착한 아바이마을이 어렴풋이 보인다.

바다향기로는 890m 중 일부 구간이 올 여름 태풍에 훼손돼 현재는 절반만 왕복할 수 있다. 산책로 초입의 외옹치해변은 이름만 구분돼 있을 뿐 속초해변과 바로 연결된다.

속초=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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