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영웅으로 기억되는 발레리나

입력
2020.10.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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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프란체스카 만의 '라스트 댄스'


작가 기준영은 2020 김승옥 문학상 우수상 작품 '들소'에 '인간은 하찮고, 인간은 존귀하다'는 메시지의 문장을 썼다. 하찮은 인간, 존귀한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두 성향이 함께 있다는 의미로 읽었다. 일면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것도 넓게 보면 왜곡이다. 그걸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건, 특히 요즘 세태에선 값진 미덕이다.

폴란드 유대인 발레리나 프란체스카 만(Frnaceska Mann, 1917~ 1943)의 삶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이레나 프루시카(Irena Prusicka) 발레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9년 브뤼셀 국제발레콩쿠르에서 125명 중 4위에 입상할 만큼 촉망받는 댄서였다.

전쟁으로 그는 게토에 갇혔지만, 아름답고 부유한 덕에 나치의 호감을 사서 모피코트를 입고 게토를 자유롭게 드나들 만큼 특권을 누렸다. 나치 친위대가 그에게 준 임무는 돈 많은 유대인들에게 제3국 비자를 사도록 중개하는 거였다. 나치는 전쟁 자금이 필요했고, 유대인은 자유와 생존이 절실했다. 물론 나치에게 비자는 기만의 미끼였다. 만이 그 사실까지 알면서 나치에 부역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10월 23일, 그도 '제3국행' 대열에 포함됐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도착한 그들 약 1,700명에게 나치 장교는 스위스 국경을 넘기 위한 임시 캠프라며 위생,방역을 위해 샤워를 하라고 명령했다. 일부는 순응했고, 일부는 동요했다.

그 순간 대열에서 이탈한 만은 경비병들조차 넋을 잃을 만큼 현란한 스트립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그리곤 마지막 남은 하이힐을 벗어 나치 장교에게 휘둘렀고, 권총을 빼앗아 장교를 사살하고 한 친위대 중사도 쏘았다. 그걸 신호탄으로 삼아 여성들이 나치 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다수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들은 이어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전원 총살당했다.

게토 생존자들은 대부분 그를 악질 부역자로 기억하고, 수용소 생존자들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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