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18일 택배기사 3년차 권지형(가명ㆍ40)씨는 '개인사업자인데 힘들면 일을 줄이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단번에 잘랐다. 지난 8일 사망한 택배기사 김원종(48)씨를 포함해 올해만 택배기사 8명이 과로로 숨지자, 일각에서 택배기사는 대리점과 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 즉 '사장님'이니 물량을 스스로 조절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택배기사들은 그러나 이에 대해 '불가능한 구조'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택배업계는 택배기사 개인의 의지로 노동 시간을 줄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택배기사의 과로를 막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런 죽음은 반복될 수 있다고도 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대책위)'가 지난 8월 택배기사 821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 주간 평균 노동 시간은 71.3시간이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과로로 인한 업무상 질병으로 판단하는 기준인 주당 60시간보다 10시간 넘게 더 일하는 셈이다.
택배기사들은 1차적으로 대리점과 '건당' 계약이 아니라 '구역당' 계약을 맺기 때문에 물량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A구역에 할당된 택배가 300개면, 담당 기사는 이를 당일 모두 처리하는 게 사실상 의무라는 것이다. 10년차 택배기사 최준영(가명ㆍ52)씨는 "계약서에 보통 '당일 배송'을 원칙으로 한다고 돼 있다"며 "택배회사가 대리점을 당일배송율로 평가하니 대리점도 택배기사에 이를 요구하고 밤 늦게까지 배송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오전 7시부터 분류 작업을 시작해 보통 오후 8,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
특히 1년 단위로 계약하는 택배기사가 대리점에 '일 못하는 사람'으로 찍히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권지형씨는 "대리점장 눈 밖에 나면 재계약을 안 해줄 수 있다는 고용 불안에 늘 시달린다"며 "내 구역에 400개가 떨어졌는데 힘들어서 100개는 내일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고 이를 수용하는 대리점장도 없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대리점 소장에게 밉보였다가 다음 계약 때 기피 구역에 배치될 수 있다는 우려도 택배기사들이 과중한 업무를 떠맡는 원인 중 하나다.
일명 '까대기'로 불리는 분류 작업도 과로의 근본 원인이다. 택배기사들은 통상 오전 7시부터 점심 시간을 넘긴 오후 1, 2시까지 분류 작업을 한다. 하지만 배송 건당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최소 5, 6시간의 분류 작업 시간에 대해서는 임금 보상이 없다. 김세규 전국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하루에 일하는 시간 절반이 분류 작업에 투입되는데, 한 푼도 못 받는 구조"라며 "과로를 없애려면 물량을 줄일 게 아니라 이 '공짜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책위 조사에 따르면 택배기사들은 노동 시간의 43%를 분류 작업에 썼다.
정부는 택배 분류 작업에 노사간 이견이 커지고 있는 만큼, 조만간 이에 대한 수행 주체를 분명히 해 이를 표준계약서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택배기사 측은 분류는 택배회사의 업무라고 주장하는 반면, 택배회사는 분류 역시 택배기사의 업무라고 맞서고 있다. 분류 작업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택배 물량이 30%가량 늘어나면서 극대화됐다.
한편 30대 택배기사가 또 다시 과로로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올해 들어 사망한 9번째 택배기사다. 대책위는 한진택배 소속 택배기사로 일하던 김모(36)씨가 지난 12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과로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대책위가 공개한 김씨의 사망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에는 과중한 업무 부담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반면 한진택배 측은 부검 결과 고인이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과로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