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초대 비서실장으로 5ㆍ6공 핵심 인사의 한 사람인 김중권 의원을 지명하자, 다수의 여권 인사들이 "어렵게 해서 이룩한 정권 교체인데, 대통령의 최측근 보좌를 구시대 인사에게 맡길 수 있는가"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더 이상 체제밖에서 비판하는 야당이 아니고 국정 책임의 주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정부 운영의 경험과 역량을 갖춘 인사가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김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수습한 이면에는 정부시스템의 제도적 본질과 국정 운영의 계속성을 꿰뚫고 있었던 내면적 역량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89년 김영삼 대통령의 야당 총재시절, 필자가 통일민주당이 주최한 '조세정책 대토론회'에 주제발표자로 초청받았다. 이 자리에서 김총재가 "문제가 많은 부가가치세 폐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고 나는 우리나라 세수의 30%를 차지하는 부가가치세를 폐지하려면 현행 정부활동의 30%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대체 세목을 마련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답하고 '부가가치세의 문제점과 폐지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김 총재는 토론회가 끝난 후 점심을 대접하면서 오늘 오 교수의 언급을 들으니 '부가가치세 폐지에 대한 나의 입장을 수정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접하면서 젊은 교수의 주장을 존중하는 모습에 내심 당혹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필자는 2003년 '정부투자기관경영평가단장'의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주관하는 정부혁신 점검회의(8~9인 참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감사원장이 장시간 대통령 면전에서 혁신 주무장관(행정자치부) 시책의 외화내빈(外華內貧)을 질타하였다. 당시 정부혁신이 대통령의 상징적인 정책의제였다는 점에서 주무장관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분위기임에도, 대통령은 묵묵히 경청하고 있었고, 회의 말미에 자신의 의견을 길지 않게 피력했다. 며칠 후 정부청사에서 개최된 '정부혁신발표대회'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됐다. 감사원장이 정부혁신의 본질과 한계를 자세히 언급하자, 대통령이 "나도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회의 종료 직전 정부혁신의 당위성을 강조했던 것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필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정 최고지도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과 참여 인사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이 대통령의 대체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산임을 깨닫게 됐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가장 우선돼야 하는 것은 인내심에 바탕을 둔 '포용력'이다. 리더가 포용하지 않는다면 리더의 의견에 순응하려는 힘이 다른 의견을 제안하려는 의지를 무산시킬 수 있고, 그 결과 상대적 '최대 공약수'를 도출할 수 있는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정시점에는 원만한 상태의 괜찮은 선택과 관계로 비추어질 수 있을지라도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리더의 의지와 집착에 경도된 결정으로 인해 잉태됐던 어려움이 노정될 여지가 크다는 점이 결코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리더의 포용력은 개인적ㆍ인간적 덕목의 하나가 아니고 공동체의 비전 실천을 조율ㆍ결집ㆍ향상시킬 수 있는 긴요한 필요조건이고 공동체의 무형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적 면모의 포용력 발휘에 그치지 않고 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정립함에 있어서도 상이한 가치관과 정책기조, 심지어 경쟁자의 입장마저 경청ㆍ용해할 수 있는 고뇌에 찬 포용력의 발휘는 국정운영의 안정과 통합은 물론이고 견고한 미래 국정 좌표의 정립에 직결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내년 서울, 부산시장선거와 2022년 대선에서 포용의 약속과 실천을 겸비한 공직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