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출신에 족보 없는 흙수저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 특수통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 분)의 도움으로 만년 형사부 검사에서 특수부 검사로 계급 상승을 하는 박태수(조인성 분). 영화 ‘내부자들’과 ‘더 킹’에 각각 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 특수부 검사’라는 점이다. 이들 외에도 영화나 드라마 속 검사는 주로 남성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비밀의 숲’ 시즌2에 나오는 대검찰청 형사법제단 소속 검사 3명 역시, 모두 남성이었다.
검찰은 줄곧 남성이 절대 다수인 조직으로 비쳐져 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제 전체 검사(2,191명) 중 31.9%(700명)는 여성이다. 법무부는 조직 내 성평등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8월 검찰 중간간부급 인사에서 능력이 검증된 여성 검사들을 적극 우대한다고 했다. 특히 고유의 전문성을 쌓아 온 여성 검사들을 발탁해 주요 보직을 맡겼다.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전문 분야의 대가(大家)임을 공인해 주는 ‘벨트’를 딴 검사들이라는 사실이다.
검찰은 전문 분야별 검사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2013년 공인전문검사 인증 제도를 도입했다. 전문지식이나 실무경험이 필요한 사건은 전문검사에게 배당하고 있는데,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될 경우엔 공인전문검사가 있는 검찰청으로 사건을 이송하기도 한다. 공인전문검사는 △전문사건 처리 실적 △전문 분야 커뮤니티 활동 내역 △검찰 전문지식 축적 기여 실적 △학위 또는 자격증 보유 여부 등을 평가해, 인증심사위원회를 걸쳐 인증된다. 현직 검사 중 1급에 해당하는 ‘블랙벨트’를 딴 검사는 4명, 2급 ‘블루벨트’는 157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 검사는 38명에 달한다.
박현주(49ㆍ사법연수원 31기) 서울동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은 1급 블랙벨트 검사 4명 중 유일한 여성 검사다. 박 부장검사는 검찰 조직 내에서 최고의 성범죄 수사 고수로 인정받아, 2016년 제도 시행 이후 처음으로 블랙벨트를 땄다. 2014년 수원지검 안양지청에서 성폭력 전담을 맡은 게 전문검사 반열에 오르는 계기가 됐다. 박 부장검사는 “안양지청 근무 당시 10대 청소년들이 죄의식 없이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건들을 주로 접하면서 관내 소년원과 학교에서 3,000여명의 학생을 상대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공인전문검사 인증 당시 800여건의 성폭력 사건을 처리한 실적을 인정 받았지만, 수사 외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제도 개선 등 정책 분야로 전문성의 외연도 확대하면서 법무부 여성아동인권과장, 여성가족부 법률자문관도 지냈다.
성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형벌의 영역, 범죄에 대한 인식이 급변하는 범죄라는 게 박 부장검사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실무 경험과 함께 수사에 대한 철학도 요구된다. 그는 “최근 n번방의 주범 ‘갓갓’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됐는데 과거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건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구형”이라면서 “몇 년 전만 해도 교화나 선처의 대상이었던 범죄들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양형 기준도 바뀌어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여성 대검 마약과장 1호’ ‘여성 서울중앙지검 강력범죄형사부장 1호’ 등의 타이틀을 보유한 원지애(46ㆍ32기) 서울중앙지검 강력범죄형사부장도 2015년 국제마약 분야에서 블루벨트 인증을 받은 공인전문검사다. 원 부장검사는 여성 검사가 드문 강력부에서 마약 수사로 전문성을 쌓아 왔다. 2011년 청주지검에서 필로폰을 국내로 들여오는 마약밀수조직을 소탕한 경험이 시발점이 됐다. 그는 “마약수사는 검사가 전문 마약수사관들과 호흡하며 한 팀으로 일하기 때문에 수사가 끝났을 때 성취감이 매우 큰 분야”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꺼번에 여러 명의 마약조직원이 체포돼 48시간 안에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도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원 부장검사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마약범죄를 근절하려면 검사들이 여러 관련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마약은 한번 퍼지면 가족과 사회, 국가를 병들게 한다. 앞으로 검찰이 국내 마약 공급을 차단하는 쪽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 간 형사공조를 통해 국제마약조직의 범죄수익을 환수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사 분야에만 전문검사가 있는 건 아니다. 정명원(42ㆍ35기) 대구지검 검사는 2015년 경북 상주시 ‘농약 사이다’ 사건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전원 유죄 의견을 이끌어 낸 국민참여재판 전문검사다. 정 검사가 공판검사를 맡았던 국민참여재판 사건은 20건이 넘는다. 그는 “국민참여재판은 법관들만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판단도 이끌어내야 한다”며 “국민 눈높이에서 법률이 어떻게 적용되고, 증거들이 결합해 ‘사실’이 어떻게 확정되는지 보여 주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경남 진주시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흉기로 5명을 살해한 안인득 사건의 국민참여재판에도 측면 지원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그동안 쌓아 온 자신만의 노하우를 검찰 공판팀에 전수한 것이다. 배심원들에게 생생한 사건 현장을 전달하도록 폐쇄회로(CC)TV 자료를 비롯, 여러 영상들을 확보해 피고인의 이동 동선과 범행 상황을 세밀하게 복원하는 게 정 검사의 비법이다. “일반 재판은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을 설득할’ 전략을 늘 함께 고민해야 하는 거죠.”
결국 각자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는 건 여성 검사로서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이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정 검사는 “과거엔 검사의 전공이란 공안ㆍ특수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형사부 검사’로 통칭됐다”며 “하지만 지금은 공안 또는 특수의 좁은 문을 뚫으려 검사들이 무한경쟁하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성취감을 느끼며 일하는 여성 검사들이 늘어났다”고 평가했다. 박 부장검사도 “자신만의 분야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다 보면 보면 출산ㆍ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등 여성 검사로서 불리한 조건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