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말했다 “삶에 지친 40대여, 와인을 실컷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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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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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세계의 와인

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 이 유명한 ‘선언’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A. N. 화이트헤드가 한 말이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고전기(510~323 BC)의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철학, 과학, 문학, 건축, 예술이 이때 눈부시게 발전했다. 뒤를 이은 로마제국이 피정복지인 그리스의 문화를 부러워해 모방했을 정도였다. 14~16세기에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을 동경한 나머지 당시의 문화예술을 부흥시키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18~19세기에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신고전주의 부활 운동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당시의 작품들이 ‘고전’의 맨 앞자리에 놓인 것을 보면, 화이트헤드의 말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 찬란한 시기의 한편에는 와인의 역사 역시 향긋하게 숙성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특권층이 와인을 독점하지 않았다. 앞선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ㆍ이집트와는 다른 점이다. 수천 년을 내려온 끝에 바로 이 시기에 이르러 와인의 대중화가 실현된 것이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의 신화와 종교가 이때 생겼고, 와인을 ‘함께 마시며’ 토론하는 모임인 심포지온이 곳곳에서 열렸다.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렸으며 와인과 관련한 ‘문화’가 생기고 성장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은 에게 문명에서 비롯했는데 기원전 2500년 무렵 에게해 남쪽에 위치한 크레타 섬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크레타 문명(2500~1400 BC)이다. 크레타의 가장 강성했던 왕 미노스의 이름을 따, 미노스 문명 또는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미노스 왕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페니키아에는 에우로페라는 공주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황소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에우로페의 미모에 넋을 잃은 제우스가 흰 황소로 변신해 사고를 친 것이다. 제우스는 그녀를 등에 태우고 힘껏 내달려 한 섬에 도착했다. 그곳이 크레타였다. 미노스 왕은 바로 이 둘,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에우로페(Europe)라는 글자가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유럽’이다. 결국 이 전설은 유럽 문명, 곧 서구 문명이 크레타에서 비롯했음을 알려준다.

에우로페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와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세멜레(디오니소스의 엄마)의 고모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앤드류 댈비의 역작인 ‘디오니소스’를 보면, 신화학자 이경덕이 쓴 추천의 글에 묘한 대목이 있다.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도 울고 갈 제우스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 에우로페였을 거라 한다. 그녀를 닮은 세멜레에게서 옛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세멜레에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미노아 문명은 신화와 전설로만 내려왔다. 그러다 1900년 아서 존 에번스라는 고고학자가 미노스 왕과 미노타우로스에 얽힌 신화의 무대인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해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방이 천 개가 넘는 궁전, 잘 닦인 포장도로와 상하수도, 현대적인 수세식 화장실과 환기 시설까지. 이는 실제 역사에서도 미노아 문명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창고에서는 포도주, 올리브유, 곡물을 담았던 피토스(저장용 대형 토기)가 발견됐으며, 크레타 섬 곳곳에서 와인의 흔적이 남은 토기와 포도 압착기, 포도와 곡물을 기록한 점토서판 등이 출토됐다. 서판에는 선문자(線文字) A로 ‘와인’을 뜻하는 기호가 새겨졌다. 이를 통해 크레타 사람들은 적어도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이집트와 페니키아에서 와인을 들여왔고,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해 수출까지 했으며, 에게해의 여러 섬들과 그리스 본토에 와인을 전파했음을 알게 됐다.



크레타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만개할 무렵, 그리스 본토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또 다른 문명이 싹트고 있었다. 바로 미케네 문명(1600~1100 BC)이다. 그런데 크레타섬에 지진해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북쪽의 테라섬(현재의 산토리니)에서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바다를 건너온 미케네인들이 침략을 일삼자 미노아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미노아 문명이 사라진 다음 페이지부터는 미케네 문명이 역사를 써내려갔다. 미케네인들은 미노아의 건축 양식과 청동무기, 선박기술뿐 아니라 선문자 A에 영향을 받아 선문자 B를 사용했다. 이 문자로 와인, 포도밭, 와인 상인 등의 낱말을 점토판에 새겨놓았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미케네 시대의 와인 흔적이 남아 있는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그들이 와인으로 해상 무역을 활발히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미케네 문명도 미노아 문명처럼 신화 속에서 회자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1876년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해 실재한 역사임을 증명했다.


미케네에는 굉장히 유명한 왕이 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다. 그는 스파르타의 왕이자 친동생인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데리고 떠나버리자 트로이에 전쟁을 선포했다.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들과 함께 1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계략을 세운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온갖 고초를 겪고 모험을 하면서 20년 만에야 귀향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영웅들의 위대한 서사와 함께 와인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에게 와인을 먹여 곯아떨어지게 한 뒤 눈을 찌르고 탈출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무릇, 영원한 것은 없다. ‘황금의 미케네’라고 불렸던 미케네 역시 기원전 1100년 즈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유는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스인들의 소행이라고 한다. 아무튼, 위대한 문명이 몰락한 탓일까. 그 뒤의 기록이나 흔적 역시 암흑시대(1100~800 BC)에 묻혀 버렸다.

300여 년간 지속된 어두움은 문명이 다시 동틀 무렵 끝을 맺는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세계’에서 ‘고대 그리스 문명’이 태동한 것이다. 산과 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땅에는 폴리스(도시국가)가 무수히 생기기 시작했다. 아테네, 테베, 스파르타, 코린토스가 대표적이다.

한편 암흑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인구 증가는 토지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그리스인들은 농경지를 확보하고 무역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그리스 밖으로 진출했다. 프랑스 남부의 마실리아(현재는 마르세유),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반도 남부 지역, 에게해의 여러 섬과 흑해 연안에까지 식민도시를 세워 포도밭을 만들고 와인양조법을 전파했다. 무역을 위해 와인을 암포라에 담아 배에 싣고 곳곳을 누볐다. 때로는 풍랑을 만나 침몰하기도 했다. 이 불운의 암포라가 발굴돼 우리는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폴리스마다 정치ㆍ경제 구조가 달라 그들은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믿는 신들과 언어만큼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동맹을 맺어 ‘국가’를 지켜냈다. 4년에 한 번씩 모여 올림피아제전(제1회는 기원전 776년)을 치르면서 말이다.

그리스 세계는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한다. 여름에는 일조량이 풍부하면서도 건조하고 비는 온화한 겨울에 내렸으니 포도 농사에는 최적이었다. 차츰 포도 재배지가 늘자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직업이 전문직으로 각광을 받았다. 농사법도 발전해 격자시렁이나 버팀목을 세우기도 했다. 간혹 비과학적인 방법도 썼는데 개화기에 비바람으로부터 싹을 보호하기 위해 두 남자가 반으로 자른 수탉을 들고 반대 방향으로 돌다가 만나는 자리에 수탉을 묻는 의식도 치렀다.

포도 농사가 유독 잘되던 식민지가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였다. 그곳을 일컬어 오이노트리아(Oenotria) 즉 ‘잘 길들여진 포도의 땅’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맛 좋은 고품질 와인을 생산한 식민지는 에게해의 섬인 타소스, 레스보스, 키오스였다. 나중에는 로도스, 코스, 스키아토스에서 생산된 와인 역시 최고급 와인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고급 와인은 포도를 말려 당도를 높인 달콤한 화이트와인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은 와인을 피토스나 암포라에서 발효시킨 다음, 암포라에 보관하고 운반했다. 암포라 안쪽에 송진을 펴바르고 각종 허브와 대리석 가루, 바닷물을 넣어 양조했다. 단맛을 강화하려고 꿀을 주로 넣었지만, 납 용기에 끓인 포도즙을 넣거나 납을 직접 넣기도 했다. 송진은 방부효과도 있었고 향도 매력적이었다. 이 역사가 전통이 돼 송진향이 배어 있는 그리스 와인 ‘레치나(retsina)’가 오늘날에도 생산된다.

이렇게 만든 와인은 알코올 도수가 일정하지 않았다. 농도는 진하고 걸쭉했다. 고대 그리스인이 와인을 물에 섞어 마신 까닭이리라. 반대로 위생을 위해 물에 와인을 타서 마시기도 했다. 이들의 양조법과 음용법은 로마시대에 답습됐다. 지역에 따라서는 중세는 물론 근대까지도 이어졌다.

그리스인은 이런 방법으로 생산된 와인을 귀족 평민 노예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기면서 와인문화를 꽃피웠다. 다만 일반 여성에게는 음주의 제한이 있었고, 계층에 따라 마시는 와인의 품질은 달랐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만큼은 와인을 마시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스파르타인은 와인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노예인 헤일로타이에게 와인을 먹인 뒤 주사를 부리는 그들을 보고 청소년이 반면교사로 삼게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와인에 신생아를 담가 간질병 유무를 가려냈다고 한다.

스파르타를 빼고는 그리스에서 와인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비웃음거리였다. 와인 대신 물을 마시려던 한 정치가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폭음하여 정신을 잃거나 물에 희석하지 않은 와인을 마신 사람 역시 교양이 없다고 지탄받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을 문명의 척도로 여겼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철학자들은 각자 와인에 대해 한 마디씩 남겼다. 특별히 플라톤의 당부를 전한다.

“18세 이하는 와인을 마시지 마라. 20대도 절제해야 한다. 40대는 삶의 건조함을 덜기 위해 마음껏 마셔도 좋다. 허나 일에 차질이 있는 사람들(군인, 뱃사공, 판관)은 조심해야 한다. 아이를 가지려는 부부는 합방하는 날 와인을 자제해야 한다. 특별히 노인은 와인을 취할 정도로 마셔도 된다. 열린 마음과 유연한 사고를 위해.”

어떤가. 오늘날 와인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역시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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