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종전선언' 순서 바꾸자?

입력
2020.10.15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이쯤 되면 진심인 듯 하다. 지난달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을 때만 해도 이 선언이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중요한지 국제 사회에 한 수 가르쳐주려는 '원 포인트 레슨'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뒤에도, 대남 전략무기가 총망라된 북한 열병식이 열린 다음에도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을 내세웠다. 꺼져버린 북핵협상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한 불쏘시개로 삼겠다는 게 정부의 새 전략인 게 분명해 보인다.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이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전쟁 당사국 정상이 모여 "자 여러분, 전쟁 끝났습니다"하면, 그게 종전선언이다. "참 쉽죠?"하고 싶지만, 실은 어렵다. 전쟁 종식의 증거물, 즉 북한 비핵화가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북미 비핵화 협상이 멈춘 지금 종전선언을 꺼낸 것은 '비핵화-종전선언'이라는 기존 프로세스의 선후를 바꿔보잔 얘기다. 구속력 없는 정치적 선언이라고 해도 약속은 약속이다. 종전선언에 참여한 이상 북미 모두 비핵화 협상에서 제 마음대로 이탈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대화 동력도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게 정부의 논리인 듯 하다.

그럼 미국도 공감하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혼자 하는 선언이 아닌 만큼 미국이 싫다 하면 종전선언도 공염불이니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영변을 내놓겠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안을 받지 않았다. 영변 정도로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담보하기 어려웠단 얘기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미국은 당연히 '플러스 알파'에 집착할 것이다. 종전선언부터 하자는 한국 제안을 무겁게 여긴다 쳐도, 종전선언 직후 이러이러한 비핵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약속 정도는 받으려 할 것이다. 결국 종전선언 행간 어디엔가 비핵화 조치는 담길 수 밖에 없다.

문 대통령의 제안이 달갑지 않은 미국의 표정은 곳곳에서 읽힌다. 마크 내퍼 미 국무부 한일담당 부차관보는 지난 8일 한 세미나에서 "우리(한미)는 공동 목표인 북한 비핵화를 위해 손 잡았을 때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것을 봐왔다"고 말했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달 28일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난 뒤 "창의적 아이디어(종전선언)들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비핵화가 먼저이고, 선(先)종전선언은 아직까진 '창의적 발상'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다.

이수혁 주미 대사의 말은 달랐다. 12일 국정감사에서 그는 "미국도 종전선언에 애착을 갖고 있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종전선언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되묻자. 미국이 그토록 종전선언을 바랐다면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동안 종전선언은 왜 이뤄지지 않은 것인가. 비핵화 결과물이 아니라 비핵화 입구로 삼을 수 있었다면 그땐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미국이 종전선언을 '애착'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되나.

북핵 협상 판이 어그러진 것은 종전선언을 못해서가 아니다. 비핵화 조치에 대한 북미의 간극 때문이었다. 거기서부터 진심을 다해 다시 시작하는 게 순리다.


조영빈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