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사진) 현대차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그룹 수장 자리는 아들에게 직접 넘겼다. 지난 2000년 현대차그룹을 세우고 홀로서기에 나선 지 20년 만에 MK시대가 막을 내린 셈이다.
14일 재계에 따르면 이날 진행된 정의선 현대차그룹 신임 회장 승진은 정 명예회장의 뜻으로 이뤄졌다. 이는 지난 15년간 아들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정 회장의 경영능력은 이미 기아차에서 확인됐다는 게 정설이다. 정 명예회장은 2005년 당시 저조한 실적으로 고전했던 기아차에 정 회장을 사장으로 보냈는데, 'K디자인'과 함께 기아차를 성공신화로 안내했다. 그룹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폭스바겐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게 주효했다. 이후 현대차 부회장으로 자리를 이동한 2009년엔 제네시스 라인업 강화, 친환경차 대량 생산, 모빌리티 종합 기업 도약 등의 성과를 냈다. 재계 관계자는 “정의선 회장을 2018년 수석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며 힘을 실어줄 때부터 사실상 수장 자리를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과 달리 가족 간 분쟁이나 승계 지연 없이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가져오게 된 배경엔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밑에서 겪었던 고충 때문이란 해석도 나온다.
정 명예회장은 1970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 경영수업과 더불어 현장 경영으로 부친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한국도시개발공사(현 현대산업개발) 사장이던 1978년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대한 공직자 및 언론인 특혜분양 사건에 휘말려 부친 대신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기는 정 명예회장과 동생을 두고 빚어졌던 승계 과정에서 찾아왔다. 정주영 창업주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동생인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경쟁을 붙이면서 현대그룹을 공동 운영하도록 했다. 이에 정 명예회장은 2000년 3월 부친과 동생의 측근이었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키면서 '왕자의 난'을 촉발시켰다. 부친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정 명예회장이 꺼내든 카드로 보였다. 당시 현대그룹에 근무했던 한 임원은 “동생과 경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마음 아파했으며 부친이 왕자의 난의 승자로 동생을 선택하면서 상처를 크게 입은 것으로 보인다”며 “경영권 승계 과정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현대차그룹 승계는 가족간 분쟁 등이 없도록 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형제의 난'을 겪으면서도 현대차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정 명예회장이 분필을 쥐고 각종 결함이 있던 카니발 차량 곳곳에 원을 그리면서 문제점을 찾아냈던 일화는 유명하다. 정 명예회장의 이런 품질경영은 2006년 미국 JD파워 신차품질조사에서 현대차를 사상 첫 1위(일반 브랜드 부문)로 올려놓기도 했다.
품질 경영을 꾀한 정 명예회장은 생산량 극대화 전략도 추구했다. 2000년 신년사에서 밝힌 ‘글로벌 톱5 메이커’가 되기 위해 그룹 내 계열사를 활용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주요 부품 생산에서부터 조립과 판매, 운반까지 이어지는 원스톱 체제를 구축했다. 또 생산시설을 전 세계 10개국에 만들면서 권역별 특성에 맞는 차량 생산도 이어 갔다.
그 결과, 정 명예회장이 그룹을 만든 지 10년 만인 2010년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판매량 5위(570만대) 완성차 업체에 올랐고, 정점인 2015년엔 801만대의 생산량까지 기록했다.
현대차가 세계 선두로 치고 나간 수소전기차 개발 역시 정 명예회장 지시로 이뤄졌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도 자동차는 굴려야 하지 않느냐”라는 의견에 따라 개발에 98년 착수해 2013년 세계 최소로 투싼 수소전기차를 출시했다.
그간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정 명예회장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포드 창립자 헨리 포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벤츠 창립자 칼 벤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의선 신임 회장은 이날 취임사를 통해 “현대차그룹의 오늘을 이룩한 정몽구 명예회장의 높은 업적과 깊은 경영철학을 계승해 미래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을 느낀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