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냄새 싫어 달렸던 그곳, 이젠 허브향 맡으러 달려가요"

입력
2020.10.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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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 마을 살리는 골목길 정원]
<상> 활력 되찾은 '오래된 과거' 해방촌

도시와 함께 해 온 문화유산이자, 한 때 삶의 터전이었던 골목길. 개발에서 소외돼 낙후된 공간으로 남겨졌던 골목길이 마을 정원으로 탈바꿈해 낙후된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세계 각국의 도시재생 비책으로 떠오른 ‘골목길 정원’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13일 좁은 골목길이 언덕을 따라 얽히고설킨 서울 용산구 해방촌. 다닥다닥 붙은 콘크리트 건물들 틈에 조성된 동네 정원 ‘해방루트’에선 단풍나무 잎이 막 물들기 시작했다. 그 주변으로 하얀 쑥부쟁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이모(38)씨는 “지저분했던 예전에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던 장소였는데 정원으로 바뀐 뒤 사람이 머물고, 모이는 공간이 됐다”며 “내 집 정원처럼 느껴져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 더미와 폐지가 가득해 모두가 기피하던 곳이다.

또 다른 동네정원 ‘쪽모이 정원’은 허브와 로즈마리는 물론, 블루베리와 애기사과나무도 심어 수확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가든'이다. 유명 루프톱 카페가 밀집한 거리 근처에 있다. 이날 루프톱 카페에 들렀다가 쪽모이 정원을 찾은 대학생 심모(21)씨는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 허브향 가득한 정원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곳곳에 만들어진 정원들은 해방촌의 힙한 매력을 더해주는 요소”라고 말했다.

서울의 ‘오래된 과거’인 해방촌은 골목길 정원이 마을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해방 이후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과 한국 전쟁 피란민들이 정착해 만들어진 해방촌은 1970년대 부흥했던 니트산업 등으로 1990년대 초 인구 2만이 넘던 곳. 그러나 주거환경 노후로 인구 유출과 상권 침체가 이어졌다.

그러다 서울시가 2015년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하고, 지난해 ‘서울정원박람회’ 개최와 함께 해방촌에 해방루트ㆍ쪽모이 정원 등 32개의 골목정원을 조성하면서 분위기는 반전했다. 주민들이 정원에 모여 앉아 이야길 나누고, 이곳을 찾는 방문객도 점차 늘면서 동네가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집 앞 정원이란 주인의식 때문에 고질적인 문제였던 쓰레기 무단배출도 줄었다.

동네정원을 관리하는 11명의 마을정원사 대표를 맡고 있는 박인형씨는 “이웃사촌이란 말조차 생소한 삭막한 시대지만 동네 정원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을정원사인 김가영씨는 “언제부턴가 음침하고 위험한 길로 여겨졌던 골목길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고 평했다. 골목길 정원이 새로운 삶터이자, 놀이터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 박 대표는 “지역경제에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방촌의 역사와 골목길 정원을 통한 마을재생 효과를 설명하는 문화 투어도 계획 중”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이외에도 낙후된 마을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녹지 공간을 확충하고,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시민과 전문가가 팀을 이뤄 72시간 안에 노후 도심의 자투리땅을 생활밀착형 주거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78곳, 1만1,855㎡에 쉼터와 마을마당 등을 만들었다. 국제규격 축구장 면적(7,140㎡)의 1.6배에 달하는 크기다. 이 사업은 ‘지난해 대한민국 국토대전’에서 국토교통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서울, 꽃으로 피다’ 캠페인을 통해 2013년부터 7년간 105만명의 시민이 2,634만 그루의 나무를 자투리 공간에 심기도 했다. 윤호준 조경하다 열음 대표는 “교류ㆍ왕래가 끊겼던 이웃과 소통의 장을 다시 열었다는 게 동네 정원이 갖는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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