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허공 속에 떠 있지 않다. 역사에 뿌리박고 있다. 2020년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과거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21세기에 들어와 세계적 차원에서 중대한 두 모멘텀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단기적 차원에서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이 안겨주는 미래 전망과 과제는 이 기획의 ‘시대정신’ 항목에서 살펴본 바 있다(6월 23일자). 그렇다면 장기적 차원에서 20세기는 어떻게 봐야 할까.
서구사회에서 20세기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전전(戰前)과 전후(戰後)다. 여기서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국주의,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의 대격변이 전전 시대를 특징지었다면, 상대적 안정이 전후 시대를 이끌었다. 전후의 안정이라는 국면의 역사가 2008년 금융위기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이러한 전후 시대를 탐구해온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토니 주트를 들 수 있다. 영국 태생의 주트는 학문적 연구는 물론 대중적 계몽을 중시했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 공론장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주트의 지성사적 위상은 독특하다. 그는 반신자유주의자이자 반공산주의자였다. 지난 20세기 후반 서구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단호히 비판했던 동시에, 동구 공산주의가 가져온 인간적 자유와 민주적 공론장의 훼손 역시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자유ㆍ평등ㆍ번영이라는 가치를 조건 없이 사랑했던 ‘순정한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주트라는 이름이 서구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5년 그가 내놓은 ‘전후 유럽 1945~2005’을 통해서였다. 주트는 이 저작에서 1945년 이후 유럽의 역사를 분석했다. 그 시기는 전후 시대(1945~1953), 번영과 불만(1953~1971), 퇴장 송가(1971~1989), 몰락 이후(1989~2005)로 나뉜다.
1,5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저작에서 주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유럽 모델’이다. 유럽 모델의 기반을 이룬 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정치 이념이라기보다 생활양식으로 봤다.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복지 제도와 직업 안정을 사회적 약속으로 간주하는 국민적 믿음이 놓여 있었다. 유럽의 지역적 차원에서 등장한 이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유럽연합(EU)이라는 국가 간 협력 모델과 결합해온 것이 21세기 초반까지 전후 유럽 역사를 이뤄 왔다.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주트의 생각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좀 더 분명하고 절박하게 제시됐다. 이 책이 발표된 2010년의 시점에서 주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고 비판하고, 더 나은 삶을 실현할 구체적인 대안으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주트에게 사회민주주의란 이제까지 무시돼온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회적 타협으로서의 복지국가를 함의했다. 주트는 국가를 최선의 중재기구로 파악했다. 국가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선 공적 대화를 강화해야 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선거에의 적극적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트는 역설했다.
주트의 결론은 이처럼 소박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국가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공론장이 국가를 제대로 견제하며, 시민들의 참여가 더욱 활발해지지 않고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없음은 21세기에 들어와 분명해져 왔다. 국가가 공적 역할을 소홀히 할 경우, 공론장이 정파적 이익을 우선할 경우,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커질 경우, 인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지난 20세기 종반과 21세기 초반이 증거했다.
자신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트는 루게릭병을 진단 받았다. 삶의 마지막에서 주트가 동료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와 나눈 대화를 2012년 펴낸 저작이 ‘20세기를 생각한다’다. 주트의 역사학적ㆍ윤리학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의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주트의 관찰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공포의 시대에 다시 진입했다. 직업을 얻는 데 소용이 되었던 기술이 일하는 생애 내내 적절한 것이라는 의식은 사라졌다. 성공적인 직업 경력을 쌓은 뒤 은퇴하여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의 확실성은 사라졌다. 인구학적으로, 경제적으로, 통계상으로 현재를 토대로 미래에 관해 합리적으로 내놓은 이 모든 추론은 전후 몇 십 년간 미국인과 유럽인의 삶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주트의 진단은 비관적이다. 21세기가 열린 후 미지의 이방인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미지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그것은 국가가 더 이상 우리 삶의 환경을 관리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이제 그 무엇도 인류의 개인적 행복을 보호하기 어려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주트의 전망이다.
이러한 전망은 2010년 주트가 세상을 떠난 후 더욱 강화돼 왔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극단적 포퓰리즘의 발흥, 공동체적 사회통합의 약화, 혐오와 차별 문화의 확산이 지난 10년 간 지구적 풍경의 현주소다. 이 현상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앞서 말한 공포다. 문제는 이 공포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떠안은 정치가 정작 그 공포를 선동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곤경에 빠트려 왔다는 점이다.
2020년대에 주트의 전망이 함의하는 바는 그렇다면 뭘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 힘이다. 주트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는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실제의 위험과 가공의 위험에 맞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다. 사회민주주의가 여전히 대안일 수 있다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이 ‘국가의 귀환’을 불러들인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는 여전히 장점이 많은 대안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통합에 대한 역설이다. 주트는 20세기의 진정한 승자는 19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평가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지난 세기에 다양한 복지국가들을 창조함으로써 시민 다수를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복잡한 대중사회를 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다음 세대가 직면한 선택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나 역사의 종말 대 역사의 복귀가 아니라 집단적 목적 대 공포 정치에 의한 사회의 침식이라는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합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포 정치에 의한 사회의 침식’의 현재적 모습은 정치적 포퓰리즘일 것이다. 극단적 이분법을 동원해 한편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다른 한편으론 공포를 동원함으로써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을 위협한다. ‘집단적 목적’의 일차적 과제가 불평등의 해소라면, 사회통합을 성취하는 길은 복지국가의 재설계 및 강화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2020년대에 걸맞은 새로운 복지국가, 더 많은 민주주의, 질 높은 사회통합이 바로 주트가 던지는 현재적 메시지일 것이다.
주트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서양 역사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에겐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와 페르낭 브로델,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과 에릭 홉스봄이 더 많이 익숙하다. 앞서 말했듯, 주트는 이들과 적잖이 다른 위상에 놓인 역사가다.
주트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이들로는 스테판 에셀과 제러미 리프킨을 들 수 있다. 주트가 현재를 성찰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라고 강조했듯, 에셀 역시 ‘분노하라’에서 분노하고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또, 주트가 미래의 대안으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했듯, 리프킨 역시 ‘유러피언 드림’에서 미국식 모델이 아닌 유럽식 모델을 새로운 시대의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트가 제시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유럽이라는 독특한 역사·사회·문화적 공간 안에서 배태된 모델이다. 따라서 비유럽사회에서 이 모델을 이식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것은 서구사회 모델을 참고서로 삼아 우리나라에 걸맞은 교과서로서의 창의적 발전모델을 구축하는 일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좋은 참고서가 있어야 훌륭한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2020년대 우리 사회의 미래에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사회통합에 대한 주트의 역사적 상상력은 상당히 매력적인 참고서다. 2020년대의 더 나은 삶은 그것을 상상하는 이들에게만 허용되고 또 실현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