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 고양이는 이틀이나 집사를 기다렸다... '울산의 기적'

입력
2020.10.10 19:30

"혹시나 했는데… 깡그리 불에 타서 챙길 거라곤 없었네요."

울산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피해 주민들이 10일 오후 화재 현장을 찾았다. 33층짜리 건물을 16시간이나 휘감은 화염이 진화된 지 이틀 만이다. 불길과 연기가 휩쓸고 지나간 각자의 집을 주민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둘러 봤다. 온전하게 남은 물건은 별로 없었다. 한 주민의 손엔 새까맣게 그을린 자동차 열쇠 하나만들려 있었다. "다 타서 챙길 게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집 안을 보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대형 플라스틱 봉투를 들고 집에 들어간 다른 주민은 이내 빈 봉투를 들고 나왔다. "들고 나올 물건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불에 닿지 않아도 쓸모가 없다. 가전제품이고 뭐고 전부 물에 젖어서...." 건물 밖에 줄지어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주민들은 탄식을 쏟아 냈다.

울산시는 피해 주민들이 경찰관과 함께 자택을 둘러 보고 귀중품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주민들이 "연휴라 문 여는 병원도 없는데, 당장 먹어야 할 약이라도 챙기고 싶다"고 호소해 간신히 얻어낸 기회였다. 입장 인원은 가구당 2명씩이었다.

안전 위해 인원 통제… 서너시간씩 대기


주민들은 낮부터 건물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대기 번호표가 60번대를 넘어갔지만, 아무로 현장을 뜨지 못했다. 3, 4시간을 기다려 겨우 집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주민들은 한명, 두명 씩 나오는 이웃들에게 다급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내부 사정은 어떤가" "물건은 좀 건졌나..." 돌아오는 답변은 신통치 않았다.

그야말로 '검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집을 확인한 주민들은 연신 한숨만 쉬었다. 박갑순(62)씨는 "열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집 창문이 전부 깨져 있었다"며 "문이 꽉 닫혀 있던 냉장고 안까지 새까맣게 그을렸을 정도"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A(59)씨는 "탄 냄새가 진동해 급하게 귀중품과 의약품 정도만 겨우 챙겼다"며 "그나마 죄다 탄 냄새가 나서 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고 했다.


고양이ㆍ졸업증명서ㆍ가족앨범… 소중한 추억들 다시 품속에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을 되찾아 안도하는 주민이 없진 않았다. 이모(50)씨는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찍은 사진이 꽂힌 가족 앨범과 대학 졸업장은 다행히 남아 있었다"며 울먹였다. 주민 B(58)씨는 "회사 거래 내역을 빼곡히 적은 장부를 두고 나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타지 않았다"고 안도했다.

10년 키웠다는 고양이가 장롱에서 구조되기도 했다. B씨는 "화재 당일 상황이 너무 급박해 가족들과 몸만 겨우 빠져 나왔다. 이틀 동안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울산=글ㆍ사진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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