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진 조성길(45)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대리가 자진해서 한국으로 왔다고 전해철 국회 정보위원장이 7일 밝혔다. 2018년 11월 이탈리아에서 사라졌던 조 전 대사대리는 당초 미국행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북미 대화에 집중하던 터라 미국행이 여의치 않자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인다. 여권이 조 전 대사대리의 자진 입국을 부각시킨 것은 북측에 기획 귀순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 남북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차단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전 위원장은 이날 "조 전 대사대리가 지난해 7월 한국에 자진해서 왔다"면서 "수차례 한국행 의사를 자발적으로 밝혔고, 우리가 그 의사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국정원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이같이 전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본인이 한국에 온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 전 대사대리의 한국행 동기나 입국 경로 등에 대해서는 신변 보호를 이유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 대신 여당이 조 전 대사대리의 망명을 공식 확인한 것은 남북관계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조 전 대사대리의 한국 망명을 공식화할 경우 북한의 반발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위원장이 "자발적으로 한국행 의사를 수차례 밝혔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조 전 대사대리가 수 차례나 망명 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은 한국 정부가 그의 망명 요청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읽혀 남측이 그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대북 메시지를 발신해 북한의 심기를 미리 달래려는 제스처가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조 전 대사대리의 망명 사실을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공개적으로 확인해 드릴 사안이 아니다"면서 철저히 함구했다. 강 장관은 "기사를 보고 놀랐다"며 "정부가 의도를 갖고 (정보 유출을) 했다는 것은 넘겨짚은 것"이라며 정부의 정보 유출 의혹도 부인했다.
국민의 힘 태영호 의원에 따르면 조 전 대사대리의 부친은 외무성 대사를 지냈으며, 장인 리도섭은 홍콩주재 총영사와 태국대사 등을 지낸 외무성 내 유력인사로 알려졌다. 평양에서도 특권층에 속하는 조 전 대사대리가 탈북을 결심한 데는 10대 중반으로 알려진 아들의 의향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한 대북 소식통은 "이미 서방권 문화에 적응한 아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길 꺼렸다"면서 "자녀 교육 문제 등 가족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 전 대사대리는 그러나 망명 과정에서 고등학생인 딸을 데려오지는 못했다. 그의 잠적 이후 딸이 북한으로 송환됐다고 당시 이탈리아 매체들이 전했다.
조 전 대사대리가 잠적했을 당시만해도 미국이나 스위스 등 서방권으로 망명할 것이란 애기가 많았다. 북한 당국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한국 망명'을 택할 경우 북한으로 송환된 딸의 신변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 전 대사대리가 한국으로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한 탈북 인사는 "유럽에 머물 경우 북한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어렵고 미국 역시 그의 망명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 정보 당국이 실제 직급이 1등 서기관인 조 전 대사대리의 대북 정보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또 당시만 해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시기여서 그의 망명이 북한과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 전 대사대리는 입국 뒤엔 정부 산하 대북 연구기관에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공사로 재직하다 2016년 망명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역시 2018년 5월까지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