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의 추억

입력
2020.10.07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16년 2월 23일 오후 7시5분,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본회의에 상정된 테러방지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시작했다. 이후 총 192시간27분(8일0시27분) 동안 38명의 의원이 연단에 올라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필리버스터의 열기는 뜨거웠다. 은수미, 박원석, 이학영, 심상정 등 민주화·시민·노동·인권 운동을 하며 고문이나 인권 침해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 토론에 나서자 기본권 제한이 화두로 부상했다. 국회방송 시청률이 개국 이래 최고로 나오고 만석이 된 본회의장 방청석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학습의 장으로 거듭났다.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같은 해 4월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됐지만 테러방지법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무소속 윤종오 의원이 테러의 정의가 모호하다며 폐지법안을 발의했지만 여기에 서명한 민주당 의원은 122명 중 5명에 불과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민주당이 지난 4월 21대 총선에서 176석 거대 여당이 된 뒤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얼마 전 이병훈 민주당 의원이 코로나 검사와 치료를 고의로 거부하는 행위를 ‘테러’로 간주하는 내용의 테러방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야당 때 악법이라고 반대한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을 개정하기는커녕 반대편을 진압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8·15 광복절 집회를 막무가내로 열어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보수진영의 몰지각과 무책임이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 표변할 수 있나.

□여당 의원들이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아예 집회ㆍ시위를 막는 법안을 제출하고, 정부가 지난 3일 개천절 집회를 막기 위해 광화문에 경찰버스를 겹겹이 쌓아 ‘재인산성’이라는 비아냥을 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한다며 만 8일 동안 쉬지 않고 열변을 토했던 사람들이 맞나 싶다. 시간이 지나면 열정은 식고 추억도 엷어진다지만 제 얼굴에 침 뱉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김영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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