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효재 선생의 성

입력
2020.10.06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4일 작고한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삶은 한국 여성운동사와 포개진다. 여성학 교육과정 개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창립, 국회의원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제 도입에 선생의 공이 있었다. 부모 성 함께 쓰기의 선봉장도 선생이었다. 1997년 '3ㆍ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이를 선언했고 여성계 인사 170명이 뒤를 따랐다. 그때부터 선생은 이름을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 모두를 표기한 ‘이이효재’로 썼다.

□ 부모 성 함께 쓰기는 호주제의 부당성을 알리려는 운동이다. 당시만 해도 공고했던 남아 선호 사상, 부계 혈통만을 부각해 여성을 그 가계의 부속물로 여기게 하는 상징이 호주제였다. 우리의 존재는 모계와 부계의 유전자 모두를 받아 탄생했는데도 부성만을 강제하는 건 생물학적으로나 법적, 사회적으로 부당하지 않은가.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은 가부장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 여성 지도자 중 선생이 부모 성 함께 쓰기 1호 선언자이긴 하지만, 처음 이를 제안한 건 신정모라씨였다. PC통신에서 급진적인 여성주의 글을 써 유명했다. 엄마 성도 표기해 부계 혈통주의에 균열을 내야 한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였다. 1997년 1월 열린 한 토론회에서 선생이 이 주장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두 달 뒤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 73세다. 온라인 공간에서 시작된 제안에도 귀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인 선생의 유연한 사고가 놀랍다.

□ 호주제는 2005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호적은 없어지고 개인을 중심으로 필요에 따라 가족관계를 표기하는 가족관계등록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니 “호적에서 파겠다” 같은 겁박은 구시대 유물이 됐다.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을 수도 있게 됐다. 문제는 “부모가 혼인 신고를 할 때 협의한 경우”로 한정했다는 점이다. 강제만 하지 않을 뿐 여전히 부성이 먼저다. 여성주의는 ‘남자가 기본인 사회’에 대한 반기다. 부성 우선주의가 여전히 법률에 남아 있는 한 호주제 폐지의 성과는 미완이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 역시 유효하다.

김지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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