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들을 떨게 한 WITSEC의 대부

입력
2020.10.05 04:30
24면
제럴드 셔(Gerald Shur, 1937.10.18~ 2020.8.25)


1957년 11월 14일, 미국 뉴욕 주 남부 작은 마을 애펄레이킨(Apalachin)에 전국 각주 번호판의 고급 승용차들이 몰려들었다. 파리만 날리던 마을 호텔은 통째 예약됐고, 예약자는 살인 등 여러 혐의로 '요주의' 리스트에 있던 한 주류 도매업자였다.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현장을 급습, 58명을 체포했다. 전국 규모의 범죄조직이 그렇게 처음 드러났다. 당시 에드거 후버 체제의 FBI는 마피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뉴욕 지부 FBI 요원 400여 명 대부분은 정치-언론-노동계 '불안세력' 감시-수사에 매달려 있었고, 일반 연방범죄 담당자는 4명이 전부였다. 체면을 구긴 후버는 며칠 뒤 '조직범죄 대응팀(Top Hoodlum Program)' 구성을 지시했다. '애펄레이킨 회동' 참석자 중 38명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고, 기소된 스무 명도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 범죄사는 저 사건을 마피아 전쟁의 분수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1만여 도시 연합기구인 미국자치단체협의회(AMA)가 1949년 연방 정부에 마약 도박 공권력 매수 등 조직범죄의 폐해를 호소하며 대응을 촉구하는 연대 탄원서를 전달했고, 50~51년 상원 청문회(Kefauver Committee)가 열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냉전기였고, 한국전쟁의 전시였다. 미 법무부도 FBI도 꿈쩍하지 않았다.

막강한 정보 권력자 후버가, 50년대 이미 5,000여 명에 달했던 마피아 '패밀리'와 그들이 매수한 '신시티(Sin City)' 권력자들의 실체를 몰랐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거의 모든 대도시에는 '패밀리가 되는 걸 대통령 되는 것보다 부러워하던' 영화 '좋은 친구들(Good Fellas)'의 '헨리(레이 리오타 분)'같은 조무래기들이 패밀리의 방벽처럼 포진해 있었다.

'애펄레이킨 회동' 이후에도 FBI의 마피아 대응은 미온적이었고, 그 이유는 지금도 '후버 미스터리'의 하나로 회자된다. '빨갱이 사냥' 전선이 흐트러질까 봐, 마피아가 건네는 정보가 쏠쏠해서라는 설이 있고, 후버가 약점(게이설)을 잡혔기 때문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법무부와의 헤게모니 다툼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61년 35세로 법무장관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취임 직후 범죄조직을 "시민의 고통과 윤리적 타락을 확산시키며 매년 수십억 달러의 검은 돈을 챙기는(...) 사적 정부(private government)"라 규정, 달랑 3명이던 법무부 조직범죄 전담 검사를 60여 명으로 늘리고 FBI와 국세청(IRS) 공조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하지만, 대통령 동생이라곤 해도 새파란 장관에게 제 수족을 떼어줄 후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발라치 청문회, 마피아 전쟁의 분수령

마피아 전쟁의 진짜 분수령은 미국 마피아 5대 패밀리에 드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물 조셉 발라치(Joseph Valachi, 1904~1971)의 1963년 10월 의회 청문회였다. 59년 마약범죄로 기소돼 1심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은 발라치는, 패밀리가 감옥으로 밀파한 히트맨(암살자)'를 살해한 뒤 로버트 법무부와의 '사전형량조정(plea bargain)'을 거쳐 의회 증언대에 섰다. TV로 중계된 '발라치 청문회'를 통해 미국 시민과 대다수 정치인은 마피아의 별칭인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 우리의 것이란 뜻)'란 낱말을 처음 들었고, 마피아 조직 보위를 위한 피의 계율인 '오메르타(Omerta, 침묵)'와 보복 규율, 조직 규모와 구성, 가공할 범죄 행각에 경악했다.

5년 뒤 마리오 푸조는 소설 '대부'를 썼고, 미 의회는 70년 10월 '부패 및 조직범죄 처벌법(일명 리코법, RICO Act)'을 제정했다. 그리고, '오메르타'의 방패를 뚫기 위한 회심의 창인 '연방 증인보호 프로그램(WITSEC)'을 71년 법제화했다. 범죄 정보를 제공하는 이(와 가족)에게 새 신분과 정착 편의 및 안전을 보장해주는 WITSEC 덕에 연방 정부는 악명높은 마피아 보스들을 비롯한 조직원 1만여 명을 기소했고, 그중 89%을 옥에 가둘 수 있었다. 전쟁의 최종 승패와 별개로, WITSEC은 마피아와 마약 조직, 알카에다 같은 테러조직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권력 무기 중 하나로 정착했고, 지금은 수많은 국가가 공식ㆍ비공식 유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WITSEC은 법무부 청년 검사 제럴드 셔(Gerald Shur)가 "사실상 혼자" 기획하고, 프로그래밍하고, 95년 은퇴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운영한 '작품'이었다. 저 극비의 장막 뒤에서 여느 범죄소설의 주인공 못지않은 파란의 삶을 살았던 그가 8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셔는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의 원년 멤버였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텍사스대 경영학과(55년)와 로스쿨(57년)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61년 4월 법무부 조직범죄팀 검사 모집 공고를 본 다음날 바로 면접을 보고 그날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력서도 내지 않고 채용된 거였다. 첫날 팀장은 내게 뉴욕시 조사대상 리스트를 주고 다음날 장관 보고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실제로 나는 둘째날 바비를 만났다." 젊은 장관의 추진력이 그러했고, 청년 검사의 의욕이 그에 못지않았다. 훗날 셔는 뉴욕서 여성복 업체를 운영하며 '미국 기성복 사업자협회' 일을 보던 아버지를 통해 '자릿세'를 뜯고, 봉제노조를 조종해 이권을 챙기던 범죄조직의 횡포를 경험하곤 했다고, "아버지의 분노가 내 불을 지핀 땔감이었다"고 말했다.

밀고자 보복 살인은 다반사였고, 수법은 '부검을 방불'케 했다. 시신 곁에 '네가 배짱(spread guts)을 부린다면 우린 네 창자를 뿌려주마(spread guts)' 같은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미행과 도청, 빌딩 난간에 매다는 '위협'만으로는 '오메르타'의 철옹성을 깨는 데 역부족이었다. 발라치의 담당검사(babysitter)가 셔였고, 그를 청문회에 이끈 것도 셔였다. 법무부는 셔의 요청에 따라 196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WITSEC을 시험 운용했고, 71년 독자적 예산을 배정받는 연방 제도로 법제화했다.

WITSEC의 증인 95%는 범죄자고, 대부분은 가족이 있었다. 주관부처인 법무부는 정보 및 증언의 대가로 그들의 이름과 출생 결혼 학력 병력(病歷)을 비롯한 이력 전반을 세탁해주고,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직장 알선 등 자립 기반을 제공했다. 물론 지원 수준은 정보 가치와 협상으로 결정됐다. 직장 알선만 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직 마약 운반책을 운수업체에 취업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사-재판 과정에 대상자(가족)가 머물 안전가옥도 필요했다. 워싱턴D.C 인근의 안가 '클리어링 하우스(clearing house, 청산의 집)'는 폭탄 테러에도 견딜 만큼 견고했고, 위치는 당연히 극비였다. WITSEC 증인들은 거기서 새 삶과 생존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2002년 셔와 함께 넌픽션 'WITSEC'를 쓴 작가 피트 얼리(Pete Earley)는 "프로그램의 저 모든 기획과 가이드라인 대부분이 셔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음경보형-유방확대시술을 해달라"

시행착오도 많았다. 초기엔 증인들의 희망에 따라 정착지를 선정하는 바람에 '살기 좋은'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로 몰려 위기를 맞기도 했다. WITSEC의 집행은 연방보안청(USMS)과 법무부 교정국(BOP,재소자의 경우)이 맡았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한 담당 보안관이 '관리 편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증인 스무 가구를 살게 해 그들끼리 마주치는 코미디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 익명성이 보장될 만한 규모의 도시 가운데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단 한 명의 친척-친구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정착지 선정 원칙이 그 이후 만들어졌다. 은행 대출 등으로 잔뜩 빚을 진 뒤 '신분이 탄로났다'며 새 신분(세탁)을 요구하는 자들도 생겨났고, 아이를 데리고 이혼한 전처가 WITSEC 증인과 재혼하는 바람에 친딸의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된 아버지가 연방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건 일도 있었다. 미 의회는 84년 증인보호법을 개정, 대상자 선정 기준을 엄격히 제한하고 빚을 갚지 않으면 증인 혜택을 박탈하게 했다. 미성년 가족 면접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방 정부는 여러 도시를 경유하는 가명 항공권을 발급해 친부모가 보안관과 함께 WITSEC 자녀를 만날 수 있게 했다.

지원 협상은 치열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갈수 있도록 중고교 성적을 조작해달라고 요구한 청소년 마약딜러의 부모도 있었고, 아내 대신 정부(情婦)와 살게 해달라고 요구한 이도 있었다. 물론 '공식적으론' 대부분 거부됐다. 하지만 77년 한 마피아 청부살인범(Aladena Fratianno)처럼, 자신의 음경보형시술과 아내의 유방확대 시술까지 받아낸 이도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WITSEC가 성형수술로 외모까지 바꿔주지는 않는다. 훗날 셔는 "프라티아노의 시술은 성기능 장애로 우울증이 심해 자살 가능성이 있다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에 따른 일반적 의료 행위였다"고 해명했다.


WITSEC 증인의 제1 생존 수칙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이다. 옛 사람은 물론이고 동선도 얽혀선 안 된다. 70년대 한 중서부 정착자는 뉴욕 콘비프샌드위치의 맛을 잊지 못해 목숨을 잃었고, 몰래 옛 집을 찾아갔다가 부비트랩에 희생된 이도 있었다. 허구 위의 새 삶도, 심지어 사랑도, 기만과 거짓으로 증축돼야 했다. 새 연인이나 재혼한 배우자와의 사랑이 영원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선량한 고발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범죄자 남편을 고발한 뒤 WITSEC에 든 한 여성(Witness X)은 어머니 임종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보안청은 그를 위해 예외적으로, 어머니 시신을 은밀한 장소로 옮겨 영결을 주선했다. 보안청 홈페이지에는 "71년 이래 WITSEC에 든 증인 8,600여 명과 가족 9,900여 명 가운데 규정을 엄수하고도 희생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적혀 있다. 규정을 못 지켜 숨진 이의 숫자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고자가 아니라 마침내 옳은 일을 하려고 용기 있게 나선 협력자들이다"


아내를 포함 5명을 살해한 뒤 기소된 '미친 개 살인마(mad dog killer)' 메리언 프루엣(Marion A. Pruett)은 81년 신분 세탁 이후 은행을 털고 8명을 살인해 체포됐다. WITSEC 10년차 보험 변호사 아서 케인(Arthur Kane)은 87년 주식시장 붕괴로 전재산을 잃고 마이애미 메릴린치 사무실에 난입해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했다. 그런 불상사가 있을 때마다 의회는 WITSEC을 청문회 심판대에 올렸고, 셔는 6차례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했다. 법무부 내부 감찰은 더 잦았다. 불미스런 사고나 무고한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셔는 먼저 스스로에게 자신을 변호하고 정당화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2002년 인터뷰에서 "내가 살인자를 세상에 풀어준 게 아니다. 살인자는 이미 세상 속에 있다. 예컨대 살바토레 그라바노(Salvatore Gravano)는 19명을 죽인 살인자지만, 그 덕에 92년 두목 존 고티(John Gotti)를 비롯한 살인자 35명을 감옥에 가둘 수 있었다"고, "일반 전과자 재범률은 약 40~50%지만 WITSEC 증인 재범률은 10%에 불과하다"고 항변했다. 그는 WITSEC이 없었다면 백악관도 '소프라노스(마피아 소재 미국 드라마)'의 범죄자 소굴처럼 됐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제럴드 셔는 1952년 결혼한 아내(Miriam Shur)와 1남1녀를 두었다. 91년 콜롬비아 세계 최대 마약조직 '메데인 카르텔'이 셔 가족을 납치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그의 가족은 철통 경호 속에 한동안 호텔서 지내야 했고, 가족 모임을 법무부 뜰에서 치른 적도 있었다. 은퇴하고도 한참 뒤인 2008년에도 그는 "내가 사는 곳은 밝히지 말아 달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패밀리'는 배신자를 '쥐새끼(rats)'라 부르고, 언론도 공익적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와 구분해 부정적 뉘앙스의 '스니치(snitches, 밀고자)'라 쓴다. 셔는 그 말을 싫어했고, 최소한 자기 앞에선 쓰지 말아달라고 청하곤 했다. "그들은 마침내 옳은 일을 하려고 용기 있게 나선(...) 협력자들"이라고 변호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가 말한 적은 없지만, WITSEC 기획에도 발라치같은 수많은 이들이 '협력'했을지 모른다. 셔가 가장 중시한 것은 자신의 안전이나 평판, 고독하게 감당해야 했을 내면의 죄책감보다 사회적 안전의 기대 총량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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